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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청소년 시민의 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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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양선희 논설위원

2016년 겨울은 위대했다. 대통령 국정 농단에 대한 비타협적 단호함. 촛불만 들고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며 우유부단한 정치권을 움직여 탄핵 가결을 이끌어낸 광장의 시민들…. 이는 장구하게 흘러갈 역사에서 후대에도 ‘놀라운 반전의 역사’로 평가될 것이다. 이와 함께 촛불광장에서 주체적 시민세력으로 부상한 ‘청소년’이 중요한 역사의 장면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촛불정국 주체세력으로 부상한 청소년
선거연령 낮춰 참정권 확대 길 터 줘야

 광장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청소년의 참여였다. 교복 차림의 중·고생과 앳된 청년들은 광장 도처에서 주도적 세력으로 존재했다. 그들은 자유발언대에 올라 거리낌없이 정치와 시민정신을 논했고, 시국담론을 폈다. 경찰에 시비 붙는 어른들을 말리며 평화를 외쳤고, 밤늦게까지 남아 쓰레기를 주우며 광장을 청소했다. 그들은 부지런하고 진지했다.

 광장의 청소년들은 기성세대가 ‘정치 무관심층’으로 분류해 버린 1020세대가 아니었다. 해외 언론들도 촛불집회 10대 청소년들의 ‘정치적 각성’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한 고등학생은 말했다. “박근혜를 뽑은 건 추억팔이에 정신 팔린 어른들이었다. 우리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었다. 앞으로 우리가 책임져야 할 나라, 더 오래 살아야 할 나라를 어른들이 앞장서 망치는 걸 더 이상 봐줄 수가 없다.” 그러고 나서 그는 머리를 꾸벅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자기 갈 길로 갔다.

 청소년들은 촛불 이후 달라지고 있다. 그들은 처음엔 대통령 퇴진과 수사 촉구에 목소리를 보탰다. 하지만 탄핵 가결 후엔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집중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 촛불집회에선 중·고교생들이 모여 ‘전국청소년혁명’이라는 전국 규모의 청소년단체를 출범시켰다. 이들은 성인 세력과 타협하지도 지원을 받지도 않겠다며, 다만 청소년 문제를 논의하고 청소년의 힘으로 교육체제를 혁명하겠다고 했다. 또 청소년도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참정권을 쟁취하겠다는 목적도 분명히 밝혔다. 촛불집회에 앞서 종각에서 열리는 ‘청소년 시국대회’에선 곧 치러질 조기 대선에 청소년들에게도 투표권을 달라는 의제가 상정되기도 했다. 청소년들은 벌써 탄핵 후의 정치적 참여 문제를 향해 달리고 있다.

 조만간 우리는 탄핵심판과는 별도로 ‘포스트 촛불정국’의 연착륙이라는 과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촛불정국은 탄핵 가결 이후 극우부터 극좌까지 다양한 욕망을 분출하며 복잡한 양상을 띤다. 정교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국면 중 하나가 참정권 확대를 주장하며 정치세력화에 나선 청소년들의 정치적 각성이 돼야 할 거다. 박사모 편에 선 한 전직 아나운서가 “고등학생도 유권자냐”고 비아냥댄 것도 뒤집어 보면 이번 촛불정국에서 10대 청소년들이 그만큼 주축세력을 형성했다는 의미다.

 실제로 청소년 요구가 아니더라도 선거연령을 낮춰야 할 필요성은 차고 넘친다. 한국 선거연령은 19세. 20세였던 일본도 18세로 낮췄고, 오스트리아·브라질 등은 16세, 북한도 17세부터 투표한다. 선거연령을 더 낮춰야 할 이유는 인구학적으로도 분명하다. 내년부터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어린이(0~14세) 인구를 추월하는 인구지진(age-quake)에 직면한다. 지난 20대 총선 당시 선거인수에서 50세 이상의 비율은 43%였다. 유권자의 고령화는 정책의 고령화를 낳는다.

 고령화 사회라도 나라는 미래를 지향해야 하고, 젊은이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야 나라는 발전한다. 젊은이를 위한 정책의 토대 마련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청소년의 정치참여는 이제 불가피하다. 우리 고령화 속도와 청소년들의 정치적 각성의 수준으로 볼 때 선거연령을 16세로 확 낮출 필요도 있어 보인다. 이것만은 어른들이 먼저 추진했으면 한다. 투쟁을 통해 정치에 눈을 뜬 청소년들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합리적 결론에 도달하는 민주주의를 경험했다는 해피앤드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라도.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