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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주재 외교관 미성년자 성추행…또 나라 망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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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칠레 주재 한국 외교관의 미성년자 성추행 사실이 밝혀지면서 우리 외교관의 자질과 기강 문제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주칠레 한국 대사관 참사관 박모씨가 미성년자로 위장한 여성을 성추행하는 영상. 박씨가 입을 맞추려는 장면. [칠레 Canal 13 방송 캡처]

주칠레 한국 대사관 참사관 박모씨가 미성년자로 위장한 여성을 성추행하는 영상. 박씨가 입을 맞추려는 장면. [칠레 Canal 13 방송 캡처]

칠레 ‘Canal 13’은 18일(현지시간) 주칠레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참사관 박모씨가 여학생으로 위장한 성인 여성을 추행하는 장면이 담긴 시사프로그램 ‘엔 수 프로피아 트람파(En Su Propia Trampa·자신의 덫에 빠지다)’를 방영했다.

공공외교 담당, 현지인 한국어 교육
칠레 방송, 제보 받고 찍은 몰카 공개
채용 비리, 공금 유용, 음주 운전 ?
재외공관원들 도덕적 해이 잇따라
“현지조사 끝나는 대로 국내 소환
징계는 물론 형사적 조치 검토”

박씨가 여성의 목을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가 하면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는 여성의 손목과 어깨를 잡고 강제로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장면도 담겼다.

성추행이 드러나자 몰래카메라 진행자에게 봐달라는 모습이 담겨 있다. [칠레 Canal 13 방송 캡처]

성추행이 드러나자 몰래카메라 진행자에게 봐달라는 모습이 담겨 있다. [칠레 Canal 13 방송 캡처]

이 프로그램은 박씨가 여학생을 성추행했다는 제보를 받은 뒤 박씨를 상대로 몰래카메라로 촬영했다. 방송에는 진행자가 이 사실을 밝히자 박씨가 연신 허리를 숙이며 “포르 파보르(Por favor·제발 부탁한다)”라며 사정하는 모습도 나왔다.

박씨는 공공외교 업무를 담당하며 현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박씨는 몰래카메라에 찍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스스로 이 사실을 대사관에 알렸고, 외교부 본부는 곧바로 박씨의 직무를 정지한 뒤 감사에 나섰다. 외교부는 박씨가 지난 9월 14세 정도의 현지 여학생에게도 성추행으로 볼 수 있는 신체 접촉을 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재외공관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감사원에 따르면 2012년 8월~2013년 12월 러시아 한국문화원장으로 재직한 A씨는 채용 공고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딸을 행정직원으로 채용해 인건비 등 명목으로 3만7000여 달러(약 4400만원)를 지급했다. 문화원 산하 세종학당에 한국어 강사가 7명이나 있는데도 적임자가 없다며 부인을 고용해 2만여 달러(약 2400만원)를 주기도 했다.

2009~2012년 주칠레 대사관 무관부에 근무했던 한 공군 중령은 관서 운영비 3만여 달러(약 3200만원)를 자신과 가족의 식료품 구입 등 생활비로 썼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2013년 12월 참사관 B씨가 음주운전을 하다가 현지인 차량 두 대를 잇따라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하지만 대사관은 사고를 외교부 본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외교관의 비행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외교부는 ‘공관근무 적격제도’를 운영하며 재외 공관에 보내기 전 직원의 자질 적정성을 따진다. 징계 기록 등을 검토해 부적격자를 골라내기 위한 절차다. 하지만 박씨의 경우 징계 기록도 없고 현지에서의 평판 조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제도적으로 이 같은 예비 범법 우려자를 걸러내기는 쉽지 않다는 뜻이다.

재외공관 직원들의 비위행위는 한국에 외교적으로도 타격을 줄 수 있는 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이 외교부 안팎에서 나온다. 외교부 차관을 지낸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해외에선 감시망이 약화됐다고 느껴 일탈하거나 나태해지는 경우가 있다”며 “특히 대민 업무에 더 철저하고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19일 보도자료를 내고 “외교부는 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미성년자 성추행과 같은 비위행위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을 적용한다는 입장하에 철저한 조사와 엄정한 조치를 신속히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이날 부처 회의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정확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징계는 물론이고 필요시 형사적 조치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박씨가 현지 조사가 끝나는 대로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소환 조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는 이날 주한 칠레 대사에게 이 같은 정부 측 조치를 설명했다.

유지은 주칠레 대사는 20일 피해 학생과 가족에게 사과하는 공식 사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별도로 현지 교민을 대상으로 한 사과문도 발표하기로 했다. 피해 학생 부모의 고소로 칠레 검찰은 박씨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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