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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 TV 보는 여자] 아닌데? 똑같은 '막영애' 아닌데? 막돼먹은 영애씨 15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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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도 아니고 한국 TV 드라마가 시즌15를 맞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전 세계적으로 높은 인기를 얻었던 시즌제 드라마들과 견주어도, ‘막돼먹은 영애씨’(2007~, tvN, 이하 ‘막영애’)의 장수는 놀랍다. 스물아홉 살이던 영애(김현숙)는 어느덧 서른아홉 살이 됐다. 우리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 ‘영애의 남자들’ 원준(최원준)·동건(이해영)·산호(김산호)·기웅(한기웅) 모두 그녀 곁을 떠났다. ‘영애의 식구들’에도 변화가 생겼다. 영애의 남동생 부부는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고, 영애의 여동생 영채(정다혜)에게는 남편 혁규(고세원)가 생겼으며 연이어 두 아이가 태어났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영애 아빠(송민형)의 향수는 줄었지만, 영애 엄마(김정하)의 사자후는 그대로다. ‘아름사(아름다운 사람들)’는 ‘낙원사’로, ‘또라이’는 ‘시간 또라이’로, ‘대독(대머리 독수리)’은 ‘갑질 덕제’로 바뀌었다. 하지만 윤 과장(윤서현)과 정 대리(정지순)의 ‘소맥’처럼 알싸한 존재감은 변함없다. 손성윤·하연주·강예빈·김선아·조현영 그리고 시즌15 이수민으로 이어진 아름사-낙원사의 여직원 라인도 이제 계보도를 그릴 정도다.

‘막영애’는 노처녀 캐릭터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직장인의 현실을 그린 드라마다. 아니, 대한민국 30대 여성의 삶과 일과 사랑을 들여다보는 드라마틱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막영애’의 장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극히 한국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 난데없는 재벌의 등장, 개연성 없는 연애, 출생의 비밀에 얽힌 반전, 폭력적인 ‘시월드’ 등 익숙하고 일반적인 한국 드라마 설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 대신 일상의 소소한 단면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물론 ‘막영애’에서도 주인공의 로맨스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애의 연애담이 ‘그들이 사는 세상’을 전부 지탱하지는 않는다. ‘영애씨의 세상’은 할리우드 대표 노처녀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 샤론 맥과이어 감독)의 브리짓 존스(르네 젤위거)와도 비슷하다. 이 영화의 한국 버전, 즉 ‘이영애의 양지다이어리’ 정도로 이해하면 어떨까.

평범하지만 특별한 여자 영애의 오늘은 우리의 하루를 닮았다. 그렇게 ‘막영애’는 시즌15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지친 일상에 녹아들었고, 우리 역시 고단한 영애의 일상을 함께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마음을 잡아 주고, 토악질로 망가져 버린 하루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시즌이 거듭되어도 영애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싱글이고 부유하지도 않다. 그녀를 슬프거나 분노하게 만드는 ‘진상들’ 역시 언제나처럼 주변에 수두룩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만큼 영애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아쉬운 점도 있다. 시즌15에서도 그녀는 결혼에 대한 강박을 떨쳐 내지 못했고, 이 드라마는 ‘삼각관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상과 연애의 균형이 또다시 흔들려, 이야기의 무게중심이 실패한 연애 쪽으로 기운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시즌15의 새로운 매력은 낙원사 여직원 수민(이수민)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일견 기존 ‘막영애’ 속 여직원 계보를 그대로 잇는 캐릭터인 듯하지만, ‘아닌데?’를 입에 달고 사는 수민은 일보 진화된 형태의 여성 캐릭터다. 남자 동료들의 성희롱에 ‘아닌데? 그거 사과할 일 아니라 신고할 일인데?’라고 말하는 수민을 보고 있자니, 윤 과장과 정 대리가 이제야 제대로 된 선생님을 만났구나 싶다. 매사에 수긍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수민. 위기 상황을 에둘러 모면하지 않는 수민의 모습은 마치 ‘막영애’ 초반의 영애를 보는 것 같다. ‘막영애’가 오랜 시간 사랑받은 이유는, 다이내믹한 현실을 반영해 낸 기민함에 있지 않을까. 이 시리즈는 이렇듯 자기 복제가 아닌 자기 반영을 통해 우리 일상을 아카이빙하고 있다. ‘막영애’에서 로맨스는 가지일 뿐, 기둥은 ‘영애’라는 캐릭터다. 부디 이미 숲을 이룬 이 드라마의 녹지에, 가지가 기둥을 뚫고 나오는 우를 범하지 않길.

글=진명현. 노트북으로 드라마, 예능, 다큐멘터리 등 장르 불문하고 동영상을 다운로드해 보는 남자. 영화사 '무브먼트' 대표. 애잔함이라는 정서에 취하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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