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재산 탕진 기업 회장 아들, 62세 형 납치 기도 구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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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오전 9시45분쯤 “마스크를 쓴 중년 남성이 차량을 가로막고 나를 체포하려 한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경찰이 출동했으나 마스크를 쓴 이를 찾을 수 없었다. 폐쇄회로TV(CCTV) 영상을 확인한 결과 가족들과 함께 집을 나선 안모(62)씨의 차량 앞에 한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쓴 이 남성의 손에는 삼단봉이 들려 있었다.

90년대 폐업 수천억 매출 섬유업체
부친 숨지자 형제 수백억 상속받아
동생 “VIP로 살았지만 돈 다 사라져”
가짜 구속영장 들고 형에 몹쓸 짓

안씨와 그 남성이 대치했던 곳은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고급 빌라 앞이었다. 사람도 많았고 뒤쪽에선 대형 공사 차량 운전자가 차를 빼라고 경적을 울렸다. 안씨는 그 남성이 삼단봉으로 차 유리를 두드리며 압박하자 경찰에 신고했다. 5분여간 차량을 막고 대치했던 그는 은색 승용차를 타고 현장을 떠났다.

안씨에 따르면 그 남성은 “구속영장을 들고 왔으니 당신을 체포하겠다.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자신을 검찰 수사관이라고 소개하며 종이 한 장을 차 안으로 건넸다고 한다. 안씨는 종이를 받아 들고 곧장 창문을 올린 뒤 내용을 확인했다. 종이엔 구속영장이라는 글씨와 함께 판사의 이름과 서명도 있었다. 안씨는 그 남성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러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경찰은 CCTV로 확인된 그 남성의 차를 추적했다. 그러나 차주는 차를 타고 다닌 사람이 따로 있다고 했다. 차주의 도움으로 용의자를 찾아냈다. 그는 검찰 수사관이 아니었다. 피해자의 넷째 동생 안모(55)씨였다.

순순히 범행을 인정한 동생 안씨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제 아버지는 지금은 폐업했지만 한때 지역에서 유명한 대기업 회장이었습니다. 옛날엔 포항제철보다도 더 컸죠.”

경찰 조사 결과 안씨는 1980년대까지 경남 지역에서 섬유업으로 한 해 수천억원대 매출을 올렸던 대기업 T사 회장의 아들이었다. 이 회사는 90년대에 문을 닫았다.

안씨 형제는 20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수백억원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상속 과정에서 형제간 다툼이 생겼고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형 안씨와 피의자인 동생 안씨의 갈등이 커졌다. 8년 전부터는 연락을 끊고 살았다.

형은 상속받은 재산으로 건물 임대업을 하며 자산가로 살고 있다. 그러나 동생 안씨는 여러 차례 사업에 실패하며 재산을 대부분 탕진했다. 일이 잘 안 풀리자 동생 안씨는 세월에 묻혀 있던 상속 문제를 다시 끄집어냈다. 그리고 이를 따지기 위해 형에게 수차례 연락했지만 형이 만나 주지 않았다.

결국 동생 안씨는 형을 접촉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인터넷에서 구속영장 양식을 찾아 가짜 영장을 만들고 수사관처럼 보이기 위해 삼단봉도 구입했다. 그는 가짜 구속영장을 이용해 형을 납치하려 한 것으로 조사됐다.

안씨는 경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저는 흔히 말하는 VIP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식들도 대기업 회장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보냈고 빌딩도 여러 채 갖고 있었죠. 그러나 외환위기를 거치며 사업은 망하고, 돈도 다 사라졌습니다. 이제라도 제대로 상속받지 못한 제 몫을 찾기 위해 형을 만나고 싶었을 뿐입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특수체포 미수, 공문서 위조, 공무원 자격 사칭 등의 혐의로 안씨를 구속해 지난 2일 검찰에 사건을 넘겼다.

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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