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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 동독 마지막 국방장관, 성공적 통일 비결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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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에펠만은 동독의 마지막 국방장관이다.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초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독일의 통일 경험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통합과정의 비결을 소개했다. 또한 통일한국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동독의 통일에서 구 동독 군인들은 본인 희망에 따라 새로운 군대에 편입되었다. 또한 집단이 귀속된 것이 아니라 개인단위로 편입해 집단적 반발 요인이 낮았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 역시 통합을 추진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어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궁극적으로 개개인이 또다른 미래에 희망을 갖고 통합에 동참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군대를 통합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남북한 통일할때 북한 주민이 원하는 미래를 파악해 최대한 통일 정책에 반영하라고 조언한다. 물론 과거 불법적 행위를 처벌할 필요성도 있다. 동독은 불법행위를 동독법으로 처벌했기 때문에 대등한 통일이 가능했다고 한다. 통일 정책에 고려할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남북한 사이에 교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통일은 제도적인 부분보다 사람의 통합, 사회적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한번 강조했다.

박용한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park.yonghan@joongang.co.kr

[국방일보 전문]

물리적 통일 이후 사회적 통합은 훨씬 어려워 그럼에도 통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다

라이너 에펠만 전 동독 국방 장관

독일 통일 25년… 요즘처럼 풍요롭고 안정적인 시대 없었다
동독 장병들 개인 단위 편입해 갈등 적어… 직업교육 중점 추진
희망 있어야 변화 수용, 심도있는 대화로 北주민 원하는 것 알아야

누구나 통일을 말하지만 이를 준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통일 자체를 언급할 뿐 그 이후를 고민하는 사람도 드물다. 동독의 마지막 국방 장관으로서 동·서독의 통일과 이후 통합과정에 핵심적 역할을 했던 라이너 에펠만(Rainer Eppelmann·73)은 이와 관련 “통일 후 기능적 통합은 쉽지만 사회적 통합은 훨씬 더 어렵고 중요하다”며 “남·북한이 통일 독일의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려면 철저한 준비와 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에펠만 전 장관은 동독 인민군의 군비축소와 군사통합을 성공적으로 수행, 독일의 평화적 통일에 기여한 주역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 비영리 공익재단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재단의 초청을 받아 지난달 말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방한 기간 국방홍보원에서 진행한 국방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다음은 일문일답.

동독의 마지막 국방장관  라이너 에펠만[사진 국방일보 양동욱]

동독의 마지막 국방장관 라이너 에펠만[사진 국방일보 양동욱]

동독의 마지막 국방 장관으로 인민군 해체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 성공적인 군사통합에 일익을 담당했다.

“동독 인민군이 (서독) 연방군에 평화롭게, 그리고 아무런 마찰 없이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동독군이 쿠데타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독 인민군은 동독의 몰락과 함께 조직 해체를 인지했다. 그렇다고 불만이나 갈등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개인 간 갈등은 있었겠지만 특별히 보고가 될 정도로 문제 갈등이 된 것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서독) 연방군에 들어간다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 장병이 있는 것은 당연했지만 이 문제가 사회적 문제, 갈등의 요소로 이어지진 않았다”

동독군의 반발이 없었던 점 이외에 군사통합 과정에 갈등이 없었던 다른 요인은 없는지?

“동독 장병들이 연방군에 개인 단위로 편입했기 때문에 갈등이 없었다. 원하는 사람에 한해 지원하고 일정한 심사를 거쳐 편입됐다. 만약 개인 단위가 아닌 조직 단위로 편입했다면 불만과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통일 과정에서 동독과 서독 주민들 사이의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동독 출신 사람들은 변화와 이동에 자발적,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직업을 가졌던 동독 주민의 70 퍼센트가 통일 이후 과거와 다른 직업으로 일하게 되는 등 변화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아마 이러한 분위기가 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국방 장관으로서 동독군 해체에 대해 장병들을 어떻게 설득했는가?

“장관 부임 후 장교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동독 인민군의) 모든 장교들은 사회주의 당의 당원이었고 군은 명칭만 인민군이지 사실 당의 군대였다. 그래서 임기를 시작하면서 불안에 떨고 있던 장교들에게 그들에게 선택에 따라 다른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한 부대 단위별 연방군 편입은 불가능하지만 개인 단위로 신청하면 연방군에 통합될 수 있으며 군인으로서 명예와 신분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장관 당시 내가 만나본 상당수 장교가 사회주의 당에서 탈당하고 미래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장관 임무를 수행하며 특히 중점적으로 추진한 부분이 있었는지?

“크게 3가지였다. 첫째는 연방군 편입을 희망할 경우 통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둘째 연방군 편입을 원하지 않을 경우 재정지원과 직업교육으로 실업과 빈곤을 겪지 않고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마지막으로 연방군이 어떤 곳인지 미리 체험할 수 있는 교육 기회를 부여했다. 이 사안은 수백 명의 장교들이 동의하기도 했다.”

군사통합을 위해 (서독) 연방군과의 협의가 어떻게 진행됐나?

“통일 전부터 연방군과 인민군은 각 측 동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접촉그룹을 만들고 통합과정에서 발생할 모든 실무적 문제를 논의했다. 이후 서독 정부와 동독에서 자유선거로 선출된 정부는 본에서 통일조약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동독 인민군 산하 모든 소속원이 개별신청을 통해 2년의 과도기를 가지고 그 후 수요가 있을 시 연방군으로 편입됐다.”

그럼 동독군은 신청하는 사람 모두가 연방군에 편입할 수 있었는가?

“우선 해당 병력이나 인력에 대한 연방군 내 수요가 있어야 했다. 또 슈타지(국가 보안성)에 협력한 사실이 있거나 사상교육을 담당했던 장교는 대상에서 제외됐다. 55세 이상과 대령과 장군, 여군도 편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의료 분야에 종사했던 여군은 편입이 가능했다.”

통일 당시 동독군은 17만여 명에 불과했지만 현재 북한군은 약 120만 명으로 추정된다. 만약 통일이 이뤄질 경우 독일과 같은 방식을 단순 적용하긴 어려워 보인다.

“물론 동독군은 숫자가 서독 연방군에 비해 훨씬 적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통일 과정에서 북한군의 집단 반발 가능성에 대해 예측하기도 어렵다. 반발 가능성은 북한군 개개인이 갖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에 의해 좌우될 것으로 생각한다. 각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어야 변화를 수용하고 변화에 무력으로 맞서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북한 주민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은 연립 정부 형태의 통일과 서독 모델의 편입 형태가 있었는데 동독 주민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이는 주민들이 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독 주민들은 본인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북한 주민이 원하는 미래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에 맞춰 진행하면 군사 통합 시 갈등이 적을 것으로 생각한다.

동독에서 자유 시위가 벌어진 당시 국경에서 발포명령으로 민간인이 사망하기도 했는데 처벌은 어떻게 이뤄졌나?

“국경수비대와 발포명령을 내린 국방위원회 소속원 등에 대한 재판은 원칙적으로 해당자가 복무하던 시기에 적용됐던 법에 근거해 이뤄졌다. 또한 자유선거 이전 선거조작과 부정부패 등 불법행위에 대해서도 역시 당시 적용되던 동독법에 의해 처벌이 진행됐다. 국제인권문제는 국제인권협약에 따라 재판을 받았다. 이 같은 과정이 동독 주민들에게 (통일이) 일방적 편입이 아닌 대등한 통합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서독 간 군사통합은 갈등과 마찰이 거의 없었다. 이 과정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두 가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벽에 등을 대고 서 있는 사람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장교 및 부사관들과의 소통을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과 두려움을 진지하게 수용하고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확신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의 분단 세월은 70년을 넘었다. 현재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통일 대신 분단이 낫다는 의견도 적지 않게 제기된다.

“한국이 변화를 원하지 않고 통일 이후 부담을 가지는 것에 대해 이해한다. 하지만 사람은 개인의 삶에 대한 책임과 함께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자유와 안전도 거주 지역에 영향을 받는다. 동북아 평화와 한반도 안정에 개인이 기여하지 않으면 결국 개인이 바라는 삶이 충분히 충족되지 않는다.”

너무 이상적으로 들린다. 보다 현실적 관점에서 설명해 달라.

“독일이 통일된 지 25년이 흘렀다. 그 세월이 쉽지 않았고 어려움도 많았다. 2조 유로(약 2500조 원)가 투입될 정도로 통일 비용도 높았다. 하지만 독일은 이러한 비용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풍요와 민주주의의 확산, 개인의 자유 등 삶의 관점에서 봤을 때 독일이 오늘날처럼 풍요롭고 안정적으로 사는 시대가 없었다고 자부한다. 독일의 경우 상당한 노력과 비용이 들었지만 그만큼의 성과가 있었다고 한국 청년들에게 설명하고 싶다. 물론 한국의 통일 이후 오랜 통합 과정을 예상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력충돌 없이 통일에 성공한 독일은 우리에게 모범사례로 꼽힌다. 그럼에도 독일 통일 과정 중 한국에서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하는 시행착오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독일 통일의 주역이었던 콜 총리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콜 총리는 당시 7년이 지나면 동독의 드레스덴 사람이 서독의 프랑크푸르트 사람과 비슷한 조건에서 살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이는 통합과정을 과소평가한 말이다. 통합은 훨씬 더 오래 걸렸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아직도 동독과 서독 지역의 임금 차이와 연금 격차가 존재한다. 통합의 가장의 큰 문제는 정치, 제도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통합이 완성돼야 한다. 40년 이상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온 사람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큰 잘못이었다. 독일은 이 사실을 통일 후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인식하게 됐다. 동·서독 간 인간관계의 중요성과 사회 격차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고 부분적으로 오늘날까지 충분한 고찰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그럼 사회적 통합을 위해 우리는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탈북 주민들과의 심도 있는 대화 교류가 필요하다. 탈북주민들은 북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주는 통로다. 정치적 결정 등에 대한 것이 아닌 북한 일상과 밀접한 관련 정보를 받을 수 있다. 탈북민을 통해 북 주민의 상황, 꿈, 소망 등이 무엇인지를 남한에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통일을 위해 조언해달라.

“내가 감히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예측할 수는 없다. 대신 더 심각한 남북 대결구도를 방지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안하고 싶다. 현재 남북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관계가 나쁜 상황은 관계가 아주 없는 상황보다 낫다고 본다. 만약 무력과 전쟁을 통한 해결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타협과 협상이 없는 통일을 추구하지 않았으면 한다.”

에펠만 전 장관은?

1943년 목수 아버지와 재단사 어머니 아래 베를린에서 출생했다. 건축가의 꿈을 품고 서베를린 건축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1961년 8월)이 설치되는 바람에 학교를 중도 포기하고 한때 미장 일을 배웠다. 1966년에는 동독의 군사훈련을 거부해 8개월간 구금됐고 이후 건설인력산업원으로 군 복무를 대체했다. 1975년 목사로 취임한 뒤에는 시민운동을 이끌었고 1982년에는 ‘베를린 청원(무기 없는 평화 만들기)’을 발표했다. 그가 동독의 마지막 국방 장관을 지냈던 시기는 1990년 4월부터 1990년 10월까지다. 통일 뒤 2005년까지 기민당 4선 하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구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독재 청산재단’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다.

국방일보 이영선 기자  ys119@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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