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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태양왕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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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300년 전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하고 “짐이 곧 국가”라는 말의 주인공이 된 루이 14세는 ‘국왕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백성들에게 권력을 위탁받은 것에 불과하다’는 ‘국왕기관설’을 부정했다. 왕의 권력은 신에 의해 승인된 것이므로 왕권을 방해할 권리를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에서였다. 루이는 철저히 절대권력을 합리화하고 신뢰했다. ‘태양왕’이라는 존칭도 국민이 보낸 찬사가 아니라 스스로 부여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 차례의 사과문을 통해 머릿속을 다 보여줬다. 그 속에 든 생각은 “짐이 곧 국가”라는 시대착오적 사고방식이다. 첫 번째 사과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는 것이 골자였다. 두 번째 사과는 “(최순실 일당이) 이권을 챙기고 위법 행위를 저질렀다고 하니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대통령직을 내려놓겠다”는 원칙을 밝혔으니 상당한 입장 변화를 보여줬다.

그럼에도 세 번의 사과문을 관통하는 것은 ‘내가 곧 국가인데 어디로 가느냐’는 얘기밖에 안 된다. 국정 농단이 드러나고 국가 운영이 사실상 마비된 상황에서 혼란을 수습하려면 질서 있는 퇴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 퇴임 로드맵을 밝히고 물러나는 것이 도리인데도 모호한 입장을 유지해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한 푼도 받은 것이 없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초법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기업은 세금을 내는 것만으로도 국가에 대한 역할이 크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주도해 비정부 민간 재단을 만들면서 기업에 참여하라고 드라이브를 걸었다. 비선 실세에게 그 일을 맡기고 청와대 수석과 장관을 직간접적으로 동원했으니 초법적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포스코는 내 아버지가 박태준을 시켜 만든 회사이니, 곧 나의 회사라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경영자를 비롯한 임원 인사와 자회사 처분 과정에도 청와대가 관여한 걸 보니 말이다. 현대차·KT에는 비선 관련 회사에 일감을 주라고 한 혐의도 드러났다.

이렇게 국정이 농단되는 사이 한국 경제는 기울고 있다. 마치 세월호가 눈 뜨고 지켜보는데도 가라앉은 상황과 흡사하다. 이제는 응급조치라도 해야 하는데 정국 불안에 묻혀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그러니 경고음이 날아들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내년 경제전망에서 한국만 콕 찍어 성장률을 2.6%로 하향 조정했다. 구조조정 지연과 가계부채 증가에다 정치적 불확실성 확대를 이유로 꼽았다.

한국호를 살리려면 촌각이 급해졌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구조조정이 시급한 조선·해운·철강·유화·건설 등 5대 분야는 기약 없이 표류하고 있고, 경제 체질 개선을 위한 5대 노동개혁 법안은 유예됐거나 국회에서 발목이 잡혀 있다. 미래의 먹거리가 됐을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은 최순실 손을 거쳐 시궁창에 처박혔다.

이 혼란의 최종 피해자는 누구일까. 어림짐작하건대 소득 상위 30%의 먹고살 만한 사람은 아니다. 결국 저소득 국민이 혼란의 쓰나미를 뒤집어 쓰게 돼 있다. 촛불시위 때 ‘오뎅’ 국물 한 컵이라도 더 나눠 주고 비옷을 반값에 팔던 거리의 국민들 말이다. 이들은 시위 현장에서 뭐라도 도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혼란이 계속되면 가장 밑바닥에서 희생을 치르게 돼 있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혼란을 끝내야 한다. 무능한 대통령을 바꾸는 것은 기본이다. 구체제를 털어내는 대변화가 없으면 희망은 없다. 패거리 문화에 젖어 있는 기존 세력으로는 제2의 최순실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미 일부 대선 후보 뒤에는 문고리가 있어 직언이 전달되지 않는다고 한다.

대통령의 최고 임무는 결국 국민이 하루 세 끼 먹는 일을 책임지는 것이다. 이 문제 해결에 밤낮을 투자해야 한다. 내가 곧 짐인데 어디로 가란 말이냐를 되뇌며 밤잠을 설치라고 대통령으로 뽑아준 게 아니다. 이제는 새벽을 준비할 때다.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통령 대신 국민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기업은 다시 신발끈을 조여 매고 기업가 정신을 불태워야 한다. 100만 공무원은 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여기서 한발 더 헛디디면 경제가 무너지고 국민의 삶이 무너진다.

김 동 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