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가 아름답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6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닉슨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정치인이었다. 40세 젊은 나이에 부통령에 발탁된 건 그런 치열함이 당내서 좋은 평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뭔가 음울하고 고민이 있는 표정인 데다 가슴을 터놓고 남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좀체 없었다고 한다. 수재였지만 워낙 가난해 고향의 위티어대를 가야만 했던 ‘흙수저 배경’이 비주류 콤플렉스, 피해 망상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많다. 이후 듀크대 로스쿨을 졸업했는데 정작 듀크대선 투명인간 취급이다. 10여 년 전 듀크대서 닉슨을 비롯한 미국 대통령에 대해 1년간 공부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대목이 궁금했다. 대통령을 배출한 동부의 다른 명문대와 달리 듀크대엔 닉슨 이름을 딴 기념관은커녕 거명하는 팸플릿 한 장 없었다. 연세 지긋한 교수들에게 물었더니 “동문인 게 수치스러워서”라고 답했다. “동문 명부에서 빼버렸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맘때쯤 박근혜 의원의 삼성동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뭔가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집 안 전체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사진, 그림 등 유품으로 뒤덮였는데, 밝고 명랑한 살림집보단 박정희 기념관 분위기였다. 한마디로 197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해 아버지와의 대화 시간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초 닉슨과는 정반대의 성장기를 보냈지만 박 대통령 책이나 인터뷰 어디에도 성인이 된 뒤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기록을 찾긴 힘들다. 박 대통령 일기책인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엔 “저울에다 보람과 고통을 올려놓고 저울질할 때, 나의 저울에선 보람이 고통을 상쇄하지 못한다”고 적혀 있다. 하기야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도 매산(煤山)에서 목매달아 죽기 전 자기 딸에게 “너는 황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이란 말을 남기기는 했다.

사실 워터게이트는 사건 자체야 뭐 그렇게 어마어마한 게 아니었다. 미국민의 분노를 키운 건 검찰 수사를 방해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한 대통령의 수습 태도였다. 사건이 터진 후 2년간 닉슨은 방해·회유·은폐·경질·모르쇠·거짓말 등 그야말로 온갖 짓을 다했다. 마지막에 사임은 사면 약속과 맞바꿨다. 그러는 과정에 ‘부동의 최악 대통령’으로 내려앉았다. 사람의 값어치는 나아갈 때보다 물러날 때 잘 드러난다는 말은 미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거부하고 부인하고 꾸며대고 잔명(殘命)에 연연하면서 망가지고 부서져 대학동문으로부터도 외면당하는 닉슨이다. 물론 닉슨은 겉으론 태연한 척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들에겐 “이해할 수 없어.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지?”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앞부분 절반쯤을 결백 강변(?辯)으로 채운 대통령 3차 담화를 들으며 박 대통령은 왜 워터게이트 실패를 그대로 따라갈까란 의문이 들었다. 탄핵을 앞둔 대통령이라면 공통점이 많은 닉슨의 실패에서 배우는 게 많을 텐데 말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말하는 대통령에게서 솔직히 ‘내려놨다’는 진정성을 느끼진 못했다. 계산이 복잡하단 느낌은 받았다. 해법엔 셈법이 숨어 있고, 자기 변호엔 성실한 담화에 감동하긴 어렵다. 다른 사람도 비슷했던지 ‘담화 불만족’이 국민의 73%다. 외신엔 ‘퇴임하는 척’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울먹이며 감성에 호소했지만 권력 미련을 못 버렸던 지난 두 차례의 담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는데, 그렇다면 조기 퇴진은 왜 하겠다는 건지 모를 일이다.

들어가기보다 나가기가 어려운 게 대한민국 정치판이다. 박 대통령이야말로 그런 불행한 과거의 당사자다. 10년도 훨씬 전 박 대통령은 자택에서 “정치를 그만둔 뒤엔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이 된장국이라도 건네는 그런 정치인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걸 기억한다. 아직 마지막 시간은 남아 있다. 다만 박 대통령이 어제 밝혔듯이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박 대통령은 수첩과 일기를 다시 꺼내 그때의 심정을 되새겼으면 좋겠다. 박정희 신화가 사는 길, 박 대통령 부녀를 지지했던 보수가 사는 길이다. 입장과 함께 퇴장이 아름다워야 아름다운 정치인이다. 아름다운 정치인이 영웅이고 정치 영웅이 정치의 품격을 높인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가 아름답다.

최 상 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