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식객의 맛집] 안동국시를 꼭 1층에서 먹어야하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6면

| 패션디자이너 김석원의 ‘국시집’

서울서 안동국시 제대로 하는 몇 안 되는 집
1969년 시작된 노포, 김영삼 전 대통령도 단골
오픈주방서 면 삶는 모습 보면 마음 푸근해져

어느덧 11월 마지막 날. 가을도 떠나간다. 한동안 주말마다 단풍 나들이객들로 고속도로가 혼잡하다는 뉴스를 접했다. 바쁜 일정 탓에 주말여행을 못 가는 현실에 가족에게 살짝 미안함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 아쉬움을 달래줄 곳이 있다. 바로 창경궁이다.

몇 년 전 서울 성북동 혜화문 근처 아파트로 이사를 온 후 가을이면 가족과 창경궁을 찾곤 한다. 산을 오르지 않고도 도심 한 가운데서 멋진 단풍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고 나서부터 말이다. 찬바람이 제법 느껴지는 늦가을의 주말 아침엔 옷을 따뜻하게 껴입고 집을 나선다. 혜화문에서부터 시작해 혜화동 로터리를 돌아 성균관대 입구를 거쳐 궁 옆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어느덧 창경궁에 도착한다.

도심 한가운데서 고궁이 전해주는 아늑함과 여유로움도 더 없이 좋은 선물이지만 고궁을 둘러싼 가을 단풍 풍경은 한마디로 감동 그 자체다.

슴슴한 사골국물에 푹 끓여낸 안동국시.

슴슴한 사골국물에 푹 끓여낸 안동국시.

그렇게 식구들과 한 두 시간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몸도 녹일겸 늦은 점심을 하러 꼭 들리는 식당이 있다. 혜화문을 끼고 돌면 보이는 ‘국시집’이다. 서울에서 안동국시를 제대로 한다고 알려진 몇 안 되는 집이다.

세상 많은 것들이 변해왔어도 시간이 멈춘 듯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노포다. 1969년 시작했으니 자연스레 식당과 관련된 이야기도 넘쳐난다. 고(故) 김영삼 대통령 등 숱한 정·재계 인사가 단골이었고, 내 또래 동네 토박이들도 이 식당과 얽힌 추억 한 두 개씩은 갖고 있을 정도다. 처음 이곳을 찾게 된 것도 성북동 토박이 친구의 소개였다.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 운동회를 마치고 가족과 외식하러 왔을 때의 그 김치 맛과 국물 맛 그대로”라고 말하는 친구 눈에서 아련함이 번졌다.

그런 이야기를 뒤로 하더라도 2대에 걸쳐 한결같은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느낌은 내가 1년에 몇 번 창경궁을 찾을 때 느끼는 아늑함과 비슷하다.

가게처럼 소박한 간판.

가게처럼 소박한 간판.

입구에 들어서기 전 자동 문이 열리면 구수한 사골국물 내음에 이미 몸이 녹는 느낌이다. 주방이 출입구 쪽 옆으로 오픈 되어 있어 살짝 고개를 빼고 들여다 보면 나이 지긋한 분들이 국시 면을 써느라 분주하다. 1, 2층으로 이뤄진 식당에서 우리가 언제나 1층에 앉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그걸 지켜보고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푸근해진다.

국시집에 왔으니 안동국시를 먹어야하지만 그 전에 꼭 먹어야 할 다른 메뉴가 있다. 수육과 청포묵이다. 세심하게 뚜껑을 덮은 그릇에 담겨 나오는 수육은 지방이 많지 않아 살짝 푸석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젓가락으로 집는 순간 부드러운 촉각이 전해져 굳이 입안에 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깻잎 장아찌에 함께 싸 먹으면 그 맛 역시 독특하다. 청포묵은 다진 고기와 김, 절인 오이채, 참깨가 곁들여지는데 고소한 향을 풍긴다. 집 간장으로 살짝 간을 해 볶았는데 한번 젓가락질을 시작하면 접시가 비워질 때까지 멈출 수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안동국시. 화려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다. 하지만 그 맛의 깊이는 이 가게의 세월만큼 진하다. 알맞게 익어 풀어진 면발과 슴슴한 사골국물에 약간의 호박과 간 소고기 고명만으로 이렇게 편안하고 포근함을 줄 수 있다니. 아내는 이 집 국수를 먹을 때마다 어릴 적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말한다. 경북 안동 인근 출신인 아내의 외할머니는 손수 밀대로 밀어 면을 만들고 가마솥에 육수를 끓여 국수를 만들어주곤 하셨단다.

안동국시 한 그릇까지 깨끗이 비우고 나면 하루짜리 도심 단풍 여행은 마무리된다. 집으로 돌아가며 문득 드는 바람은 오늘의 산책과 따끈한 국시 한 그릇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따듯하고 포근한 추억으로 남았으면 하는 것이다. 아무리 첨단을 걷는 시대라 해도 오래도록 인정 받는 것은 시간 속에 걸러지는 것들이다. 그런 게 살아남아 클래식이 된다. 기본에 충실한 이런 음식의 가치를 내 아이들도 오래도록 누리고 즐기길 소망한다.

국시집

● 주소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1가 9 (창경궁로43길 9)
● 전화 : 02-762-1924
● 영업시간 : 낮12시~오후2시30분, 오후5시~8시30분(명절휴무)
● 주차 : 가능
● 메뉴 : 안동국시(9000원), 수육(소 1만8000원, 대 3만3000원), 청포묵(1만원)
● 드링크 : 소주(4000원), 맥주(4000원)

이주의 식객

김석원

패션 디자이너. 아내 윤원정과 함께 브랜드 ‘앤디 앤 뎁(ANDY & DEBB)’을 17년째 이끌고 있다. 언제나 포마드를 이용한 2:8 헤어스타일을 고집하는 젠틀맨. 업계에선 오래된 자타 공인 미식가. TV 맛프로 ‘수요미식회’에도 가끔 얼굴을 비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