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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가보지 않은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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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전봉준 투쟁단’은 양재IC에서 멈췄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광화문, 시민항쟁단은 청운동에서 막혔다. 청와대가 코앞이었다. 관군과 항쟁군은 국가기강을 문란케 한 통치자와 횡포 무리를 척결하라는 광장의 외침에는 한편이었지만 직역이 달랐을 뿐이다. 122년 전 가을, 한양으로 진격하던 동학군은 안성 부근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아 퇴각했다. 보국안민 깃발을 들고 승평일월과 군주의 덕화를 빌던 백성이었다. 군주가 급기야 효유문을 발했다. ‘경동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 적자(赤子)로서 분수를 지키라’. 지난 토요일 밤 항쟁단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청와대의 묵묵부답은 마음이 찢긴 채 내놓은 고종의 비답(批答)보다 못했다.

국민·정치권 부가된 짐 산더미
촛불의 가시적 결실 보여주려면
‘정당 재정렬’이 필수적 조건
개헌은 차기 정권에 착수할 과제
탄핵·개헌·대선의 동시 수행은
현재의 정당 구도로는 불안해

 상소 자격이 없는 소민(小民) 동학도에게 고종은 조선 공론정치의 율법을 어기고 어지(御旨)를 내리는 아량을 베풀었다. 122년 후 대통령은 청와대에 있다. 청와대 사람들은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메시지만을 몇 차례 발령했다. 누구의 뜻인지는 불분명했다. 5차 촛불집회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관저 깊숙이 박혀 있다. 눈발이 조금 날리고 촛불이 점멸하고 함성이 일었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저 어디가 끝인가?

 1987년 시민항쟁은 직선제 개헌과 민주정치 상량식을 일궈냈다. 국민이 집주인이 되었다. 첫 번째 세입자는 ‘질서 있는 이행’을 책임진 노태우 정권이었다. 성공적으로 정권을 넘겨주고 집을 비웠다. 두 번째 세입자는 민주주의의 기본 골격을 구축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군부세력을 청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후의 세입자들은 YS가 만든 ‘민주의 집’에 경제관리 코너를 만들고 인테리어를 바꾸고 소소한 제도를 도입해 활용도를 높였는데, 재건축이 필요한 시점이 점차 다가왔다. 균열 조짐이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지만 그 집을 넘겨받은 박근혜는 자신이 주인임을 의심치 않았다. 내력벽을 허물고 골격을 바꿨다. 민주의 집은 결국 주저앉았다. 헛간에 피신한 대통령은 ‘세입자 중과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자발적 퇴진은 군주의 덕화에 기대는 것인데 대통령의 무치(無恥) 앞에서는 이미 가능한 경로가 아니다. 가보지 않은 길, 두 개의 시나리오가 가시화됐다. ‘탄핵과 돌발 상황’. 탄핵은 지루한 공방전과 탄핵 이후 급작스러운 대선정국을 거쳐야 하는 험로다. 출구 없는 상태에서 택한 차선책인데 치러야 할 비용이 태산이다. 다른 하나는, ‘돌발 하야’다. ‘세월호 7시간’이나 수치심을 유발하는 뜻밖의 사건이 돌출한다면 대통령의 마지막 버팀목인 자존심을 분지를 수 있다. 상상하기 싫으나 또 다른 재앙이다. 대통령 궐위상황에서 대선을 두 달 내에 치러야 한다. 어쨌든 국민과 정치권에 부가된 짐은 산더미다. 정당성을 다 태워먹은 여당은 그렇다 쳐도, 무엇이 중한지 모른 채 집권 욕심에 들뜬 민주당, 틈새에 낀 국민의당은 탄핵, 돌발 상황, 대선, 개헌을 한꺼번에 감당할 내공이 없다. 불안하다.

 비박의 집단 탈당과 신당 창립이 시급해진 이유다. 머뭇거리는 40여 명 비박계 의원은 이미 망가진 새누리당에 어떤 미련이 남아 있는가? ‘민주의 집’ 잔해 속에 새누리당도 묻혔음을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가? 김용태 의원과 남경필 지사는 백의종군했다. 신보수의 새로운 정치거점이 구축돼야 야당도 정신을 차리고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정치일정에 함께 대비할 수 있다.

 촛불 민심을 국민주권적 시민정치의 동력으로 승화시키려면 정당의 경쟁구도가 복원돼야 한다. 한 축이 무너진 채로는 버거운 정치일정을 소화할 수 없고, 대선에서 불법이 낄 여지를 감시하지도 못한다. ‘보수의 대참사’가 일어났으므로 진보정권에 차례를 넘기는 것이 순리지만, 세력 균형이 깨진 대선판은 반드시 대규모의 불복세력을 생산한다. 그건 지금보다 더 큰 정치적 재앙이다.

 뭔가 촛불의 가시적 결실을 보여주려면 ‘정당 재정렬’이 필수적 조건이다. 손학규, 반기문이 새로운 구심점이 될 수 있다. 안철수든, 비박계든 손·반 연대의 연출가로 나서 성사시킨다면 그런대로 경쟁적 정당구도가 만들어진다. 명패만 남은 집권여당의 허망한 집터에 앉아 틈새 반격을 잘도 해내는 이정현 대표와 친박계 의원들은 과연 ‘고목처럼 쓰러진 보수’의 참담한 현실을 직시하고는 있는가? 야당과 함께 쓰나미 정국을 헤쳐 나가려면 새누리당 장례식을 얼른 치르고 조속히 신보수 정당을 신축하는 것이 순서다. 개헌은 차기 정권의 순산(順産) 이후에나 착수할 과제다. 현재의 정당 구도로는 탄핵, 개헌, 대선의 동시 수행이라는 ‘가보지 않은 길’이 불안하기만 하다. 미국 시인 프로스트(R. Frost)는 이렇게 읊었다. “먼 훗날 어디선가 나는/한숨 쉬며 이렇게 말하려나/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덜 다닌 길을 갔었노라고/그래서 인생이 온통 달라졌노라고.”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