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문서와 여당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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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5공화국 들어 정가에 나돌기 시작한 이른바 괴문서가 발전(?)을 거듭해 최근 들어 더욱 논란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수시로 내용을 증보해 가는 최근의 괴문서는 주로 오는 5월 임기가 끝나는 국회상임위원장과 민정당 시·도지부장 명단을 담고 있다. 또 13대 민정당의 공천탈락자·확정자·보류자 명단이란 것도 벌써 여러번 나돌았다.
원래 인사철이 다가오면 이해 당사자간에, 또는 주변의 구경꾼간에 하마평은 나돌게 마련이다.
그러나 최근 민정당 주변의 괴문서는 단순히 인지상정을 반영한 수준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개중에는 음해성 의도가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도 있고, 또 경쟁 상대간에 조직적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천탈락자로 분류된 의원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만저만 아니다. 당내 공천경쟁자 또는 야당쪽 라이벌이 괴문서를 지역구에 돌려「끝난사람」으로 악선전 당한 의원도 있다. 또 괴문서가 엉터리라는 것을 해명하거나 자신의 조직원들에게「건재」를 입증해 보이기 위해 특별히 신경을 써야하는 의원 숫자는 매우 많은 실정이다.
반면 자신이 상임위원장이나 시·도지부장 명단에 올랐다하여 노골적으로 기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슬쩍슬쩍 괴문서를 홀리는 사람도 있다.
괴문서의 내용이 얼마나 적중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어느 정도의 정치감각이 있는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결과적으로 부분적인 적중률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12대 공천에 앞서 나돈 괴문서의 적중률이 보잘 것 없었던 것을 보면 역시 신빙성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일단 괴문서에 오른 의원들이『혹시 여권의 어떤 기구에서 나를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아닐까』고 진원을 캐거나 당지도부에 작성자를 색출하라고 아우성치는 것을 보면 여당생리의 한 단면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역구 기반, 유권자의 평가, 자신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언제, 어떻게「당명」하나로 운명이 바뀔지 모른다는 여당의원들의 불안감이 괴문서의 토양을 조성하고 의원들을 「해바라기성」으로 만드는 측면은 없을까. 결국 정보의 원활한 흐름, 건강한 신뢰기반 등이 부족한데서 이런 현상이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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