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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와 함께 친미 독재자 쫓아내, CIA 공적 1호, 638회 암살 시도 모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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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호 14면

쿠바혁명의 두 주인공인 피델 카스트로(오른쪽)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해 1959년 1월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앙포토]

“쿠바 최고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의 방에는 남미 혁명가인 호세 마르티, 시몬 볼리바르, 수크레와 함께 미국 대통령이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흉상이 놓여 있었다.”


25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난 피델 카스트로(1926~2016)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생전에 만나 인터뷰한 드문 외국인인 프랑스 언론인 이냐시오 라모네의 회고다. 라모네는 2003년 1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여러 차례 카스트로와 만나서 했던 대화를 기록해 『피델 카스트로, 마이 라이프』라는 책을 냈다. 미국을 겨눈 비수같이 생긴 쿠바에서 게릴라전으로 친미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반미의 아이콘 카스트로의 방에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인 링컨의 흉상이 있다는 사실은 카스트로의 사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라모네는 카스트로가 사회주의자나 노동운동가보다 쿠바 독립의 영웅인 호세 마르티를 더 많이 인용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자라기보다 반식민주의자에 가깝다는 평가를 했다.


하지만 카스트로가 남긴 사회주의 국가 쿠바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인구 1130만 명에 국내총생산(GDP) 827억7500만 달러(세계 65위), 1인당 GDP 7274달러(세계 86위)의 가난한 제3세계 나라일 뿐이다. 무상교육을 받지만 졸업 뒤 공장에 취업하면 월급이 400페소(약 17달러)에 불과하고 의사가 되면 매달 700페소(약 30달러)를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쿠바 국민은 정부가 지급한 배급쿠폰으로 소득을 보전받는다. ‘라보데가’라는 국영상점에선 정부가 개인에게 지급한 배급쿠폰을 쌀, 설탕, 기름, 럼주 등으로 바꿀 수 있다. 주거와 교통비도 무상에 가깝다. 의료기관은 무료이며 ‘라파르마샤’라는 브랜드의 국영약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싼값으로 약을 살 수 있다.


혁명 뒤 대부분의 기업을 국유화해 1981년의 경우 전체 고용에서 공공 부문이 91%, 민간(주로 소규모 자영업) 부문이 8%를 차지했다. 1990년 소련 원조가 끊기면서 국민에게 창업과 자영업을 장려하면서 2000년의 경우 공공 부문이 76%, 민간 부문이 23% 정도로 바뀌었다. 경제자유도는 아직도 세계 최하 수준이다.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계획경제를 실시하고 있어 경제효율이 낮은 편이다. 경제사정이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카스트로는 1970~80년대 제3세계에 원조를 제공했다. 개발도상국이 해외원조에 나선 것은 드문 기록이다.


카스트로는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쿠바 망명객의 공적 1호였다. 쿠바 정보국장을 지낸 파비안 에스칼란테는 카스트로 재임 기간 중 638회나 되는 암살 시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독약, 독주사기, 독충, 세균, 폭탄, 총격 등 온갖 종류의 암살 시도가 계획되거나 실행 직전까지 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쿠바는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했으며 이해 취임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그해 4월 CIA로 하여금 쿠바 망명자들이 피그스만 침공을 하도록 지원했으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쿠바와의 대립은 더욱 격화했다. 급기야 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이어졌다. 세계가 핵전쟁에 가장 다가간 것으로 평가되는 이 사건 이후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소련에 약속했다. 대신 경제봉쇄 등으로 쿠바를 옥죄어 오다 2014년 국교 정상화에 합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1959년 혁명 이후 쿠바 인구의 약 10%에 이르는 120만 명 이상의 쿠바인이 최단거리 140㎞의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망명했다.


카스트로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그는 1926년 8월 13일 쿠바 동부 오리엔테주 마야리시에서 스페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앙헬 카스트로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출신으로 쿠바에 이민와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며 부유하게 살았다. 7명의 자녀를 뒀던 앙헬은 가정부였던 리나 루스 곤살레스와의 사이에서 5명의 혼외자를 뒀는데 그중 둘째가 피델이었고 라울이 막내였다.

피델 카스트로(앞 왼쪽)가 2011년 4월 19일 아바나에서 열린 제6차 쿠바공산당 대회에서 국가평의회 의장인 동생 라울(오른쪽)의 팔을 들어올리고 있다. 형 피델은 2006년 급성 장출혈 수술을 받은 후 동생 라울에게 권력을 잠정 이양했으며 2008년 정계은퇴를 발표했다. [로이터=뉴시스]

아바나대 법대에 진학한 뒤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으며 47년 쿠바 인민당에 입당했다. 52년 변호사가 된 뒤 하원의원 선거 출마를 준비하던 중 그해 3월 10일 바티스타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선거가 취소됐다.


청년 변호사 카스트로는 이에 분노해 아바나 헌법보장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소송은 기각됐다. 이 사건은 26세의 젊은 변호사 카스트로가 혁명가로 변신한 계기가 됐다. 53년 초 카스트로는 160명의 젊은이를 비밀리에 모아 무장과 훈련을 시킨 뒤 그해 7월 26일 1000여 명의 수비대가 주둔 중인 고향 산티아고데쿠바의 몬카다 군기지를 습격했다. 하지만 공격은 실패했고 카스트로도 체포됐다. 재판을 받으면서 타고난 웅변술로 자신을 변론했다. 그는 자신의 변론을 비밀리에 빼돌려 외부에서 출간했다. “역사가 나를 방면(사면)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문구도 여기서 나왔다.

90세인 피델 카스트로(오른쪽)가 지난 9월 25일 쿠바 아바나를 방문한 중국 리커창 총리(왼쪽)의 예방을 받고 환담하고 있다. [AP=뉴시스]

55년 5월 사면돼 감옥에서 나온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건너가 무장단체를 조직했으며 56년 12월 2일 체 게바라를 포함한 82명의 대원을 데리고 요트를 타고 귀국해 다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다시 실패하고 그는 산속으로 쫓겨나 게릴라전을 벌였다. 험난한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카스트로의 끈질긴 게릴라 전략에 정부군의 공세도 한계를 드러냈다. 민심도 이미 독재자 바티스타를 떠난 지 오래였다. 결국 58년 12월 31일 바티스타는 30억 달러에 달하는 개인재산을 챙겨 인근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도망쳤고 이듬해 카스트로는 혁명에 성공해 정권을 인수했다.


이후 이뤄진 50년 가까운 카스트로의 통치는 평가가 엇갈린다. 공산당 일당독재의 권위주의 통치로 반체제 인사와 언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해 수많은 쿠바인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93년에는 외동딸마저 미국으로 떠났다. 그럼에도 반세기 가까이 계속된 미국의 경제봉쇄에도 무상 의료와 교육제도를 운용하며 서구 수준의 낮은 유아사망률을 유지하고 문맹률을 2% 이하로 낮춘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채인택 논설위원, 강병철 기자chae.intaek@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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