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전설 가득한 "별들의 고향"|할리우드 추억 일깨운 영화의 본 고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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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내 마음의 연인들>
[카렌!]
가끔 가슴 속에서 솟아나는 그리운 소리다.
아득한 옛날 눈썹이 긴 처녀들은 여배우처럼 비올라 (lash curler의 한 상표) 로 속눈썹을 말아 눈꺼풀 위로 올린 게 유행했는데 그걸「카루」(curl)했다고들 했다. 나처럼 눈썹이 짧은 여자들은 속눈썹이 길게 보이고 「카루」가 하고 싶어 약을 사 발랐는데 그 약 이름이 「카렌」이었다. 예쁜 약곽엔「마를레네·디트리히」의 요요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있었다. 당시 나는 영화 『모로코』에 나왔던「마를레네·디트리히」의 팬이었고 미남 배우 「타이론·파워」에게 혹했었다.
그런데 2차 대전이 터지자 미국 영화는 「제임즈·스튜어트」「진·아더」주연의 『「스미드」도회로 가다』가 마지막으로 상영 금지되고 오로지 독일·프랑스 영화만 볼 수 있게 되었다. 동경 하숙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흘러간 명화만 상영하는 3류 영화관이 있었다. 거기서 『망향』(페페르모코) 『고향』『만춘의 곡』등 가슴을 달콤하게 도려낼 지경의 페이도스 넘치는 명화를 셀 수 없도록 많이 보고 『세라비……』내 인생을 비수와 체념으로 망쳐버릴 정도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렇게 수없이 흘러간 명화 속의 스타들은 젊은 시절의 내 꿈이요, 마음의 연인들이었다.

<올브리너의 발자국>
지금 나는 할리우드의 중심가에 있는 영원한 할리우드의 상징인 화려한 원색의 중국식 극장「차이니즈 디어터」앞에 서 있다.
극장 앞 조그마한 광장에는 유명 배우들의 손과 발자국을 시멘트에 떠서 남겨놓고 있는데 「올·브리너」의 흔적을 발견하고 다가 섰을 때, 『일용이 엄마 아니라고?』
막내가 빙긋이 웃으며 말해 뒤돌아보니 멀리 왁스 뮤지엄으로 열심히 들어가고 있는 아리따운 여성 두 사람이 보였다.
『김수미씨잇!』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게 되자 발을 멈추고 의아스런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던 김수미·정영숙씨가 이쪽을 쳐다본다.
김수미씨는 평소에 호감적으로 나를 대해준 일이 많아 내 심저에 쌓인 정신적인 빚이 있었다.
『어머니, 「제프리·헌터」네』 하면서 막내는 지상에 새겨진 별 옆에서 또 빙긋이 웃었다.
길목 양쪽 포도엔 수많은 별들 속에 흘러간 스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앞으로도 새로운 이름들로 메워질 많은 공백의 별들이 남아 있는 이 명성의 거리는 할리우드의 명소가 되어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싸구려 상점 포스터 가게엔 과거와 현재가 끊임 없이 교차한 그리운 명배우들의 모습이 담긴 프로마이드·열쇠걸이·재떨이·손가방 등을 팔고 있었다. 내가 놀란건 사후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질기도록 대중의 사랑을 받고 인기가 있는「마릴린·먼로」의 존재였다.「빌리·와일더」가 1955년에 감독한 『7년만의 외출』에서 포도의 철망 위에 선 「먼로」가 때마침 지하철에서 철망 사이로 불어온 뜨끈한 바람에 흰 드레스 자락이 휘날리자 부끄럽다는 듯이 예쁜 허벅지를 감추려고 움츠리며 웃고 서있는 귀여운 모습의 명 장면 사진이 가게마다 꽉 메우고 있었다.

<새 영화 촬영은 여전>
극장 옆 공지에선 마침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지 헤드폰을 쓴 남자들이 폼을 잡고 앉아있었으며 구경꾼으로 왁자지껄 인파를 이루고 있었다. 확실치는 않았지만 어디서 본듯한 텁텁한 중년의 얼굴, 점 잖은 브라운 윗도리의 남자가 왔다 갔다 하며 뭣인가 지시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서 보니 왕년의 테리비전 영화 『보난자』의 막내 아들. 「마이클·랜던」이 아닌가.
초기 할리우드 번영 시대의 신화적인 스타들의 전설로 수놓아진 전성기를 추상하면서 (여전히 영화 연예계의 중심지이지만) 오늘날 사양길을 가고있는 스타의 철도 위에서 뭔지 나는 무상의 감상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규모와 활기는 줄었지만 「차이니즈 디어터」에선 아직도 굵직한 영화들을 개봉상영하고 있고 할리우드 부근의 고급 찻집들은 젊고 희망에 부푼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장차의 스타 지망생들인지 개성 따라 맞춰 입은 의상의 아가씨들이 즐겁게 지저귀며 앉아 있고 기회를 기다리는 미인 종업원들의 움직임도 생기에 차 있었다.
나는 이 찻집에서 아무리 세상이 많이 변했다해도 목표가 있는 젊은이들의 의기와 부푼 희망과 기대가 갖는 생기를 마셨고 설혹 미래에 좌절과 실망이 도사리고 있을 망정 현재의 건강한 꿈을 확인할수 있었다.
목표가 있는 젊음이란 아름담고 먼 옛날 「카롄」을 발라도 발라도 길어지지 않던 내 속눈썹, 그 시대의 나 역시 연한 엽록소가 스며든 오월의 숲 같은 청춘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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