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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위원 명단, 발언 등 심사과정 다 공개…예술 지원에 관료 개입 차단하는 영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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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한정호 공연 칼럼니스트 영국 시티대 문화정책 석사

한정호
공연 칼럼니스트
영국 시티대 문화정책 석사

문화예술을 지원하면서 어떻게 정치논리를 배제할 것인가, 그 답이 영국예술위원회(Arts Council of England: ACE)에 있다. ACE는 1946년 발족한 세계 최초의 예술 지원 국가기관으로, 우리의 문화예술위원회에 해당한다. 지금 국내 문화예술지원 체계는 상당 부분 영국을 참고하고 있다. 문화와 체육·관광을 한 부처로 통합하고, 복권기금을 예술 진흥에 사용하는 것부터 그렇다. ACE가 종전 후 기초 예술을 관주도로 부양하던 정책은, 문예위 예술지원책의 근간이 됐다.

“지원하되 불간섭” 70년간 원칙 지켜
정치적 편향 심사 땐 위원회서 퇴출

영국은 ACE 출범부터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통해 정치 권력과 예술 사이의 거리를 마련하려 했다. 공적 지원을 무기로 특정 예술 방향을 유도하려는 관료 개입을 차단하는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 제시됐고, 이는 개발도상국의 예술 지원 모델로 영향을 미쳤다.

심사를 진행하는 ACE 임원들은 법률과 재원 마련 전문가, 영국 각 지역 산하 예술위원회 위원들 가운데 정부가 인선한다. 그러나 보수당과 노동당 사이의 정권 변동과 관계없이 ACE의 결정은 21세기 들어 사실상 정치적 중립 속에서 진행됐다.

ACE는 3개년 계획에 따른 예술단체 지원과 런던 올림픽(2012)이나 1차 대전 발발 100주년(2014)처럼 특별 프로젝트별로 지원을 구분한다. 심사 위원은 직권 남용 방지와 공정성 담보를 위한 서약을 하고 심사에 참여하며, 위원장의 중요 임무는 예술 단체의 의견을 청취하고 불만을 수렴하는 것이다. 심사 위원 개별의 성향을 문제 삼는 이해 관계자들의 반론 표명은 철저히 보장되며, 만약 예술계의 비토를 감수하고 정치적으로 편향된 심사를 진행하면 다음 ACE 위원 명단에 남기 어렵다.

심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찰을 최소화하는 노력은 정보 공개에서 시작된다. 예술지원을 정하는 회의록이 ACE 홈페이지에 게시되고, 국민 누구나 요청하면 위원 명단과 발언 내용 전체를 확인할 수 있다. 영국 조각가 앤서니 곰리가 ACE 심사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복권기금을 자신의 미술 프로젝트에 쓰기 위해 다른 위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을 때도 회의록이 공개되면서 파문이 진정됐다.

보통 15명 내외로 구성되는 심사 결정 회의는 소수가 맹렬히 반대하면 결정을 다음 회의로 미루고 그 사이 서로의 주장 근거를 확인하는 전문가 탐문 과정이 이어진다. 예술경영, 회계, 사회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고급 인력이 정책 결정 과정에 실질적으로 참가할 수 있다. 과거 ACE서도 예산을 장르별로 할당하는 방식이 운용되면서, 특히 적은 예산이 배정된 문학 관련 위원의 반발이 있었지만, 21세기 들어 지원 대상을 ‘정기 지원 조직’(Regularly Funded Organisations: RFO)과 ‘신규 지원 조직’으로 구분하면서 장르간 반목은 수그러들었다.

한정호
공연 칼럼니스트
영국 시티대 문화정책 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