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치금융과 속죄양 1|이석구<경제부 기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그러면 그렇지. 정부정책과 지시에 따라 대츨해준것 뿐인데 업무상 배임이라니 말도 안돼』
지난 11일 전서울신탁은행장 홍윤섭씨(64)에 대한 대법원의 무죄판결을 보고 금융인들은 너나 없이 기뻐하며 한마디씩 했다.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반가와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홍씨가 처했던 상황이 언제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를 것이 금융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관치금융하에서 정책금융및 부실기업 뒤치다꺼리에 시달리는 금융인들은 문제가 생겨. 속죄양이 필요하면 언제나 홍씨처럼 업무상 배임죄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풍토다.
홍씨가 업무상 배임죄로 구속된 것은 79년4월.
은행빚 1천6백20억원에 담보가액 4백25억원 뿐인 울산에 대해 원리금상환이 불가능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2백36억원을 추가로 빌려줘 은행에 손해를 끼쳤다는 혐의다. 언뜻보면 과다대출로 은행에 손해를 끼쳤으므로 업무상 배임임에 틀림없다.
그는 79년8월 1심에서 징역3년, 81년4월 2심에서 징역 10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홍씨가 자금 압박에 허덕이는 울산그룹에 여신을 지나치게 해준 것은 당시 중화학공업육성·해운진흥 등 정부정책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원심을 파기했다.
재판부는『대기업의 부도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심각한 영향과 금융기관의 공신력 추락등을 고려, 도산위기에 처한 울산그룹에 신규여신을 해주었다는 것만으로 업무상 배임죄의 성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이유를 덧붙였다.
79년이나 지금이나 금융계의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은행대출이 담보가액을 훨씬 넘는 덩치 큰 부실기업이 허다하고 은행으로서는 이들 기업에 계속 뒷돈을 대줘야할 판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으니 금융인들이 자기일처럼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로써 홍씨의 법률상 명예는 일단 회복된 셈이지만 그 때문에 산산이 부서진 36년간의 금융인생은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 그는 지난 7년간 『죄인이 어디 나다니느냐』며 두문불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이같은 불행한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하는 길은 금융인들이 자신들의 판단과 소신으로 금융업무를 수행하는 금융 자율화뿐이라는 생각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