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치사의혹 남김없이 씻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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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양파를 훔치려던 사람이 임금앞에 잡혀와 재판을 받았다. 임금은 훔치려던 양파 1백개를 날로 먹든지, 곤장 1백대를 맞든지, 은화 1백을 속전으로 물든지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돈을 내자니 아깝고 곤장을 맞자니 너무 아플 것 같은 도둑은 양파 1백개를 먹겠다고 했다.
그러나 날 양파를 먹자니 10개도 채 못 먹어 입안과 오장육부가 불이라도 붙은 듯 맵고 쓰려 참기 어려웠다. 그래서 도저히 양파는 못 먹겠으니 매를 맞겠다고 나섰다. 그렇지만 곤장도 20대를 넘자 아프다 못해 곧 죽을것만 같았다. 참다못한 도둑은 결국 속전을 내고 풀려났다.
아깝더라도 처음부터 속전을 냈더라면 날 양파 먹고 곤장맞는 곤욕은 면했을 걸 돈 아끼다 돈은 돈대로 잃고, 양파먹고 매맞는 곤욕까지 더 겪고만 것이다.
어려운 일일수록 당장은 괴롭더라도 사회통념에 맞게 정도로 접근하는 게 부작용이 가장 적다. 당장의 어려움을 피해보자고 재주를 부리거나 호도하려다간 오히려 일만 더 크게 벌인다.
이번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도 마찬가지다.
따져보면 이렇게 고약한 측면을 고루 갖춘 사건도 드물다. 피해자가 학생인데다 피의자도 아닌 참고인이었다.
그런 젊은이를 죽이고 말았으니 아무나 마구잡이로 고문수사를 하고 있다고 동내방내 광고를 해댄 셈이다.
그 동안도 고문사건이 있었고, 또 직·간접으로 그런 경험에 접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때문에 박군사건이 터지자 있을 수 없는 일이 돌발했다기보다는 언제고 그런 일이 날줄 알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 동시에 이제는 이 사회에서 이런 악습은 단연코 몰아내야 한다는 결의가 일고있다.
이렇게 워낙 사건의 성격이 고약한데다 자식 기르는 부모들을 포함해 대다수 국민들이 남의 일같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박군사건은 가라앉히려 해도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진정시키는 묘수란 있을 수 없다. 밝혀질게 다 밝혀지고 추궁당할 만큼 추궁되고서야 가라앉는다.
따라서 분위기를 가급적 빨리 가라앉히려면 진상을 의심할 여지없이 밝혀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고 완벽하게 재발방지가 보장되는 길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수사와 대처 과정에는 사건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듯한 구석이 많이 눈에 뛴다.
사건발생직후 사건을 감추다 못해 수사관이 책상을 쾅 쳤더니 박군이 억 하면서 쓰러져 쇼크사했다고 한 경찰책임자의 호도는 경찰수사의 신뢰성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렸다.
그러니 그 후의 경찰수사는 콩으로 메주를 순다해도 믿기지가 않게 되었다. 급하다고 호도를 해보려다 경찰에 대한 신뢰만 망쳐버린 것이다.
검찰의 경우도 비슷한 우를 범했다. 처음 공언한대로 검찰이 직접 수사를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경찰의 명예운운하며 1차수사를 경찰에 넘겼는가 하면 피의자도 없는 비공개현장검증 등으로 초록은 동색이란 의구심만 남겼다. 통념에서 벗어난 수사과정이 수사결과 자체의 신뢰마저 손상한 것이다.
수사과정에 비하면 정치권에서 단행된 정치도의적 인책조치는 그런대로 수준급이었다.
그 동안 여러사건·사고에서 정치적 문책조치가 적절치 못하거나 시기를 놓쳐 정치적 부담을 진 경우가 많았던데 비해 이번은 인책범위나 시기면에서 정도대로 해보려는 노력을 읽을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대로 해보자는 노력은 국회소집과정까지도 이어지지 못했다.
박군고문치사사건은 당연히 임시국회를 소집해서 다툴만한 증대사건임에 틀림없다. 집권당이 국회상임위소집정도로 때워보려고 한 것은 이 사건을 보는 국민감정과 결의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증거다.
더구나 신민·국민당이 공동소집한 임시국회에 앞서 내무위 소집으로 선수를 치려고까지 한 것은 인식부족을 넘어 실소를 자아낼 일이다.
그런 얄팍한 선수로 얻은것이 무엇인가. 결국 임시국회에 참석하지 않고는 못견 딜 일을 집권당의 모양만 흉하게 되지 않았는가. 이 또한 괴롭더라도 정도로 접근하지 않고 편한 길로 가려다 입은 상처다. 그렇긴 해도 결국 야당소집의 임시국회를 정상화시킨 건 늦었지만 잘된 일이다.
국회가 열린 이상 이번 국회의 임무는 일점의 의혹도 남김없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 이당에서 고문을 몰아내는 기초를 닦는 일이 되어야한다.
국회에서마저 의심의 안개를 거두지 못한다면 그 어디서 흔들린 신뢰기반을 다시 구축할 수 있겠는가.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 사건의 악몽에서 슬기롭게 벗어나는 일 일 것이다.
그러자면 국회국정조사권을 발동해서라도 사건의 진상을 의심없이 밝혀내고 항구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다음 학기의 학원가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그래야 될 필요는 더욱 절박하다.
지난 6년간 법에 규정된 국정조사권은 집권측의 반대로 한번도 발동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은 집권측에도 큰 부담이 되어왔다. 박군사건에 대한 엄정한 국회조사로 그러한 부담 또한 더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어려운 때일수록 양측에 따라 정도로 접근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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