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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정국, 대권 잠룡들의 성적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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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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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논설위원

가장 크게 점수가 깎인 주자는 반기문, 그리고 문재인이다. 우선 반기문은 치명타를 입었다. 친박의 ‘아바타’ 이미지를 벗지 못해 박근혜 대통령과 지지율이 동반 추락하며 문재인에게 1위를 내줬다. 반기문도 4·13 총선으로 친박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며 이들에게만 의존해선 대권을 잡을 수 없다는 걸 실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친박만큼 반기문만 쳐다보고 매달리는 세력이 국회 안에 없다는 게 그의 딜레마다. 어쨌든 반기문이 대권을 잡으려면 따스했던 친박 아랫목을 버리고 차디찬 제3지대 벌판으로 나가야 한다. 그게 쉬울지는 의문이다. 관료 출신은 권력자가 시키는 건 잘하지만 스스로 상황을 주도하는 건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뉴욕의 잠 못 이루는 밤’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반기문·문재인, 확장성에 한계 드러내
사심 버리고 구국 앞장서야 반등 가능

문재인은 최순실 정국의 최고 수혜자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당 지지율이 10%포인트 가까이 오른 반면 그 개인의 지지율은 3%포인트가량 오르는 데 그쳤다. 더불어민주당이 ‘문재인당’인 건 세상이 다 안다. 그런데도 문재인의 지지율 상승폭이 당의 그것에 크게 뒤지는 건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그를 대통령감으로 보지 않는 이가 상당하다는 뜻이다. 사실 문재인은 박 대통령과 은근히 공통점이 많다. 문고리 ‘3인방’(박근혜)과 ‘3철’(문재인)에 의존하고, 세상 떠난 어른(박정희·노무현)의 후광으로 정치하며, 뱉은 말을 뒤늦게 뒤집는 행태가 서로 빼다 박았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나라보다 자신의 이해관계부터 의식하는 스타일도 비슷하다. 거국중립내각을 가장 먼저 꺼냈다가 여당이 받자 철회해버리는 모습에서 사심 없이 나라를 위해 일할 사람이란 인상을 받은 국민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연일 헛발질을 하는 와중인데도 문재인은 거국내각도, 탄핵도, 하야도, 그 어떤 카드도 꺼내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20%대에 고착된 지지율로는 당선이 불확실하다는 계산에서 상황 관리→지지율 상승→대세론 굳히기→대선 승리란 사심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잠룡들은 어떤가. 박원순은 국민의 관심이 급했는지 촛불시위에 참가해 감점을 자초했다. 서울시장은 나라에서 가장 큰 지자체의 안전과 질서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말로 하면 될 대통령 비난을 시위장에서 행동으로 표출했다. 이렇게 공익을 가장한 사심에서 튀어나온 오버는 국민이 바로 꿰뚫어본다. 안철수·유승민·김무성·손학규·남경필·안희정·원희룡 등도 점수가 낮기는 매한가지다. 모처럼 터진 대박 찬스를 어떻게 내게 유리하게 요리할까에만 골몰할 뿐, 다 함께 손잡고 나라부터 살리자고 제안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만약 이들이 한데 모여 ▶대통령은 국정에서 손을 떼고 ▶국회가 초당적 인물을 총리로 뽑아 국정을 정상화한 뒤 ▶대권을 놓고 공정하게 경쟁하겠다고 선언했다면 어땠을까. 누구도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고 정국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을 것이다.

문재인의 대선 도전은 상수다. 새누리당에서도 친박의 몰락과 개혁파의 부상만큼은 예견 가능한 시나리오다. 국민의당이 친박·친문 이외 세력을 규합해 판을 바꾸려 할 것임도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구도를 놓고 주판알을 튀기기 앞서 정치권은 민심부터 직시해야 한다.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만큼 흔들리는 국정에 불안감이 큰 게 국민들 마음이다. 다음 정권은 근본주의 정치인 대신 중도적인 리더십으로 나라를 안정시킬 인물에게 맡기자는 공감대가 이뤄질 공산이 크다. 안철수가 박 대통령의 일방적 총리 지명을 명분으로 ‘하야’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나 손학규가 ‘총리 조건부 수락’ 카드로 새누리당과의 연합 가능성을 시사한 건 모두 이런 흐름을 타고 나온 것이다.

지금 잠룡들이 할 일은 분명하다.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유승민이든, 손학규든 바로 당장 ‘구국을 위한 대선주자 연석회의’를 제안하고 모든 잠룡들을 불러모아라. 대권 경쟁은 잠시 접어두고, 국정을 중립적으로 관리할 책임총리·거국내각 구성에 온 머리를 맞대라. 여기서 누가 가장 열심히 나라를 위해 뛰었는지가 국민이 대통령감을 판단할 가늠자가 될 것이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