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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할수록 이상한 한진해운 청산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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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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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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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해운의 퇴출 과정은 이상했다. 한진해운 직원들 사이에선 권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꼬리를 물었다. 사실 지난 5월까지만 해도 시장에선 한진해운의 회생 가능성을 높게 봤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이 5월 22일 펴낸 보고서도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중 하나를 살린다면 한진이 유리하다고 분석했다. 한진해운은 회생의 전제조건 중 하나인 해운동맹 가입에도 성공했다. 그런데 5월 이후 상황은 한진해운에 불리하게 돌아간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3000억원의 정부 지원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한진해운은 8월 31일 백기(법정관리 신청)를 들었다.

최순실 ‘미운털’ 조양호 찍어내기 의혹
선무당 하나가 나라를 잡아먹고 있다

정부는 한진해운 퇴출이 원칙대로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대주주가 자구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도덕적 해이를 묵인하지 않겠다”고 조 회장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마불사’ 신화에 사로잡힌 대주주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뒤 벌어진 최악의 물류대란과 막대한 손실은 정부의 한진해운 퇴출 결정이 준비 없이 내려졌다는 것을 입증했다. 대양을 누비던 한국 해운업은 한진해운 퇴출 이후 더 벼랑 끝 위기로 몰렸다. 한진해운은 6곳의 컨테이너 터미널을 매각한 데 이어 미국 롱비치터미널·광양터미널·경인터미널을 팔려고 내놨다. 요지에 자리 잡은 금싸라기 자산들은 모두 외국 경쟁 업체에서 사 갈 것이다. 한국 해운사들은 우리 땅에 지어진 터미널도 세를 내고 이용해야 할 판이다. 현대상선이 한진해운을 인수한다고 해도 ‘껍데기’만 남은 상태다.

그래 놓고 정부는 지난달 31일 해운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선박펀드 조성 등에 모두 6조5000억원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3000억원의 자금 지원을 거부해 한진해운발 물류대란을 일으킨 지 딱 두 달 만이다. 정부는 수주 절벽에 처한 국내 조선사에 국적 해운사의 수주 물량을 몰아준다는 계획이다. 대우해양조선은 연명을 하겠지만 국적 해운사의 경쟁력 강화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바닥을 친 용선료보다 새 배를 사는 원가가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돈을 쏟아부을 것 같으면 왜 한진해운을 퇴출시켰을까. 구조조정 경험이 많은 한국의 경제 관료들이 왜 이런 실책을 했을까.

그런데 이제야 퍼즐의 한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지난 5월 2일 조양호 회장이 평창 동계올림픽조직위원장 자리에서 갑자기 물러난 배경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조 회장이 K스포츠재단에 10억원 출연을 거부한 게 사퇴 이유”라고 주장했었다. 여기에다 경향신문이 또 하나 퍼즐 조각을 추가했다. 최순실의 더블루K가 스위스 건설회사 누슬리와 손잡고 3000억원짜리 평창 동계올림픽 경기장 공사를 따려고 했는데 조 회장이 거부하면서 ‘미운털’이 박혔다는 의혹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최순실의 범죄 혐의 중 가장 악질적이다. 대통령의 권력을 업고 공갈을 친 셈이다. 기업들은 전두환 정권의 국제그룹 해체를 떠올렸을 것이다. ‘찍히면 죽는다’는 공포스러운 기억 말이다.

경제 총사령탑인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대통령에게 대면보고를 한 지 한 달이 넘었다. 대통령을 직접 만나지 않고 총 17조5000억원의 정부 자금이 들어가는 조선·해운산업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다는 얘기다. 오늘 유 경제부총리의 후임으로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내정됐다. 임 위원장은 한진해운발 물류대란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장본인이다. 야권의 엄청난 반대 속에 임종룡의 리더십은 씨도 안 먹힐 게 뻔하다.

1997년 말 외환위기의 망령이 다시 살아나는 듯한 위기다. 그런데 국가의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대통령 대신 최순실의 이름이 어른거린다. 음모론으로 치부하기엔 현실이 너무 막장이다. 관료들은 접근조차 못하는 ‘구중궁궐’에 최순실은 제집처럼 드나들었다고 한다. 선무당 하나가 대한민국을 잡아먹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은 야권과 거국내각을 구성해도 시원찮은 판에 또 불통 인사를 단행했다. 우리 국민은 다시 한번 불행한 전직 대통령을 봐야 할 운명인가.

정철근 중앙SUNDAY 플래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