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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평론가 유홍준 <미술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예술비평이 창작이냐, 학문적 활동의 하나로 보아야 하느냐에 대하여는 늘 엇갈린 견해가 있어왔다. 그래서 비평은 비평일 따름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게 됐지만 비평은 세상이 필요로하는 하나의 품목이고 그것의 존재방식은 당대의 예술적 과제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만은 부인되지 않는다.
80년대의 새로운 미술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비평은 적지 않는 몫을 담당해온 것으로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미술의 원초적 소통기능을 회복하고 시각과 인식에서 일대 변혁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것의 논리와 정당성을 펴나가는 일은 창작보다도 오히려 비평쪽에서 해야만 했던 중요한 몫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그 변혁의 논리가 인정되고 이제는 도전이 아니라 창조적 성과가 기대되는 싯점에 이르게 되면서 80년대 비평은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만 할 처지가 됐다. 종래의 방식대로 논리의 정당성만 내세우면 그것은 창작자에게 매우 거추장스런 존재로 느껴질 따름이다. 완벽한 논리는 오히려 생기있고 탄력성있는 작업에 방해된다는 것이다. 정답을 내놓고 창작한다는 것보다 싱거운 일은 없을 테니까.
이런 까닭일까. 아닌게 아니라 요즈음 미술비평은 활자매체보다도 전시장이나 토론회에서 오가는 작가·평론가·관객의 대화속에서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비평의 새로운 형태를 읽어보게된다.
『이 인물의 몸동작은 사선으로 젖혀졌을때 더 역동감이 살아나지 않았을까요?』 『화면이 좀 수다스러운 느낌이네요』
『갑은 자기 생각보다 적은 것을 그렸고, 을은 자기생각보다 많은것을 그리려고한것 같아요』
이런 식의 질문과 지적에 대해 작가들은 자못 진지해진다.
비평을 비아냥거리던 오만도 이앞에선 겸손해짐을 볼때 나는 이런 평론, 말하자면 「로비평론」의 가치와 힘을 새삼 느끼곤했다.
그리고 멋진 글장이 평론가보다도 이름남기지 않는 저 구비평론가들이 이 시대 미술문화 창조에 중요한 몫을 하고있다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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