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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세련된 귀족 문화를 꽃 피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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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4호 면

【총평】


?문벌 귀족 사회가 발달하면서 자기, 금속 공예, 나전 칠기 등 정교하고 세련된 귀족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다. 고려의 귀족 문화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분야는 공예였다. 공예는 귀족들의 생활 도구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구 등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특히 자기 공예가 뛰어났다.


?자기는 고도로 발달된 기술을 요구하는 생산품 중의 하나였다. 흙으로 만든 그릇은 토기에서부터 점차 도기, 자기로 발전했다. 자기를 굽기 위해서는 1,300도의 열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마를 만드는 것 이외에도 여러 기술적 요인이 뒤따라야 했다.


?고려자기는 신라와 발해의 전통과 기술을 토대로 송의 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귀족 사회의 전성기인 11세기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다. 고려는 송의 자기 기술을 도입하여, 송을 제외하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질 좋은 자기를 생산했다. 이로 인해 고려의 자기는 중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서긍이 고려에 와서 도자기 색깔에 주목한 것 역시 송과의 비교 대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도자기의 제작은 당시 국제 교류의 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중국 각지의 청자와 그 제작 기술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고려는 아름다운 색감과 독창적인 기법을 개발하여 예술성을 한층 더 발전시킨 고려 청자를 만들어 중국, 일본 등지로 수출했다.


?고려 청자는 자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흙과 연료가 풍부하고, 바닷길로 운송이 가능한 전라도 강진과 부안 등지에서 많이 만들어졌다. 고려 전기에는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은 순청자를 주로 제작 했다. 11세기를 거치면서 형태의 다양성과 빛깔의 우아함이 더해져 12세기 전반에는 고려 청자 특유의 비색 청자가 만들어졌다. 자기 가운데 가장 이름난 것은 비취색이 나는 청자인데, 중국인들도 천하의 명품으로 손 꼽았다.

?“도자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 사람들은 비색(翡色)이라고 부른다. 근년에 와서 만드는 솜씨가 교묘하고 빛깔도 더욱 예뻐졌다. 술 그릇의 모양은 오이와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고 연꽃이나 엎드린 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 또 주발, 접시, 술잔, 사발, 꽃병, 옥으로 만든 술잔 등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법에 따라 한 것들이므로 생각하고 그리지 않는다. 다만, 술그릇만은 다른 그릇과 다르기 때문에 특별히 드러내 소개해 준다.”

-“선화봉사고려도경”-?(출처: 천재교육 한국사)

<청자 참외모양 병> (국보 제94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장릉(長陵, 고려 仁宗의 능)에서 인종의 시책(諡冊)과 함께 발견되었다. 유색은 비색(翡色)이 얇고 고르게 베풀어졌다. 꽃병으로 단정하고 세련된 형태의 작품이다. 고려청자 최성기인 1146년의 작품이다.


?12세기 중반에는 고려만의 독창적 기법인 상감법이 개발되었다. 전통 공예 기법을 응용한 상감법을 활용하여 생동감 있고 예술성 높은 회화적 표현을 해냈다. 상감 기법은 청자의 겉 부분을 파낸 후에 그 자리에 백토나 흑토를 메워 무늬를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상감청자는 무늬를 훨씬 다양하고 화려하게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청자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상감청자는 이후 고려 청자의 주류를 이루며 강화도에 도읍한 13세기 중반까지 주류를 이루었으나, 원 간섭기 이후 원으로부터 북방 가마의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청자의 빛깔이 퇴조하여 점차 소박한 분청사기로 바뀌어 갔다. 고려자기의 생산지로는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이 가장 유명하였다.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 간송미술관 소장).

몸체의 원 무늬 안에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학을, 원 무늬 밖에는 땅으로 향하는 학들을 상감기법으로 표현했다. 당당한 형태와 완벽한 문양 구사가 돋보이는 대표적인 고려 청자 매병이다.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귀족들은 문방구, 향로, 화분, 의자, 촛대, 베개 등과 같은 생활 용품에도 청자를 두루 사용했으며, 고려 후기에는 양민들도 청자를 사용할 정도로 청자 생산이 크게 증가했다.


송의 영향으로 고려의 금속 공예 역시 불구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다. 특히 청동기 표면을 파내고 실처럼 만든 은을 채워 넣어 무늬를 장식하는 은입사 기술이 발달했다.


?한편, 옻칠한 바탕에 자개를 붙여 무늬를 나타내는 나전 칠기 공예도 크게 발달했다. 특히 불경을 넣는 경함, 화장품 갑, 문방구 등이 남아 있는데, 이런 나전 칠기 공예는 조선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원의 왕후는 고려의 나전 칠기 공예를 높이 사 불경을 담을 함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그림을 관장하는 도화서 소속의 화원이나 문인 중에서 화가가 많이 배출되었다.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천산대렵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호복(胡服)을 입고 말을 모는 무사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원대 북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수월관음도는 화려한 색채를 우아하게 사용하여 관음보살의 자비로움을 잘 나타낸 대표적 불화이다. 벽화로는 부석사 조사당의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유명하다.


?고려의 서예는 전기에는 구양순 체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탄연의 글씨가 특히 뛰어났다. 후기에는 송설체가 유행했는데, 이암이 뛰어났다.


?고려의 음악은 송에서 들어 온 대성악이 궁중 음악으로 발전된 아악과 당악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향악(속악)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송에서 들여온 대성악은 궁중 음악인 아악으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전통 음악으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송의 악기가 전래되기도 하였다.


당악의 영향을 받은 향악이 발달하여 속요와 어울리는 많은 곡이 만들어졌다. 향악으로는 동동, 한림별곡 등이 유명하다. 악기는 우리 전통 악기에 송의 악기가 수입되어 약 40종이나 되었다.


?귀족들은 각종 수입을 기반으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들은 큰 누각을 짓거나 별장을 소유하기도 했으며 외출할 때에는 시종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다녔다. 또한 중국에서 들어온 차를 즐겼고 중국에서 들어온 비단으로 화려한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차맷돌(왼쪽, 국립청주박물관), 청자 상감운학문화문합(가운데, 호림박물관), 귀면 청동로(오른쪽, 국립중앙박물관)(* 출처: 비상교육 한국사)

고려 무신정권의 격변기를 살던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30여 편의 다시(茶詩)를 남겼다. 고려 중기의 문인 이연종(李衍宗)은 『사박치암혜차(謝朴恥庵惠茶)』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명전을 이렇게 썼다.?

“젊은 시절, 영남의 절에 손님으로 가서(少年爲客嶺南寺)? 여러 번 스님 따라 명전 놀이 했었지(茗戰屢從方外戱)? 용암의 바위 가장자리, 봉산의 기슭에서(龍巖巖畔鳳山麓)? 대나무 사이로 스님 따라 매부리만 한 차를 땄네(竹裏隨僧摘鷹?)? 한식 전에 만든 차가 제일 좋다고 하는데(火前試焙云最佳)? 더구나 용천과 봉정의 물이 있음에랴(況有龍泉鳳井水)? ?사미승, (차 다루는)삼매의 날랜 솜씨(沙彌自快三昧手)? 백설 같은 다말(茶沫), 찻잔에 따르기를 그치지 않네(雪乳飜?點不已) ” - 『동문선』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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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음다 풍속이 사치해지고, 다양한 다회가 열렸던 고려중·후기에는 관부의 차세(茶稅) 핍박이 대단했다. 당시 이규보는 손한장에게 '과도한 차세를 금할 수 있도록 힘써 달라'는 내용의 시를 보낸다. 바로 『孫翰長復和次韻寄之(손한장부화차운기지)』는 차세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의 고통을 나타낸 것이다. '관에서 감독하여 늙은이와 어린아이까지 징발하였네(官督家丁無老稚)'라고 개탄했다. 차를 만들기 위해 노인과 어린이까지 차출하고, 만든 차는 서울까지 등짐으로 날라야 했다. 일정량의 차를 해마다 바치기도 했다. 그는 '차는 백성의 애끊는 고혈이니, 수많은 사람의 피땀으로 얻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당시 농민들은 차세를 피해 차나무에 불을 지르고, 차가 나는 산림을 훼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악순환을 해결하기 위해 이규보는 '산림과 들판을 불살라 차의 공납을 금한다면 남녘 백성들이 차세 면함은 이로부터 시작되리(焚山燎野禁稅茶 唱作南民息肩始)'라고 했다.?


(** 출처: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차(茶)와 사람: 고려 귀족 우아한 茶 문화 뒤엔 백성들의 피와 땀’, 중앙일보 2014년 4월 20일)


?백성이 공납으로 차를 바쳤다는 내용과 귀족들이 차를 음미하고 차 문화를 향유하였다는 사실은 고려 시대에 차의 생산과 소비가 대규모로 이루어졌음을 추론할 수 있게 해 준다. 차를 공납으로 바치기 위해 고통 받았던 백성의 모습과 자유분방하게 차 문화를 누렸던 귀족들의 생활이 이규보와 이연종의 시를 통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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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키워드】


☞ 고려는 아름다운 색감과 독창적인 기법을 개발하여 예술성을 한층 더 발전시킨 [고려 청자]를 만들었다. 고려 전기에는 [순청자]를 주로 제작 했다. 12세기 전반에는 고려 청자 특유의 [비색 청자]가 만들어졌다. 12세기 중반에는 [상감법]이 개발되었다. [상감청자]는 청자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청동기 표면을 파내고 실처럼 만든 은을 채워 넣어 무늬를 장식하는 [은입사 기술]이 발달했다. [나전 칠기 공예]도 크게 발달했다. 그림을 관장하는 [도화서] 소속의 화원이나 문인 중에서 화가가 많이 배출되었다.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천산대렵도]가 남아 있다. 고려의 서예는 전기에는 [구양순 체]가, 후기에는 [송설체]가 유행했다. 송에서 들여온 [대성악]은 궁중 음악인 [아악]으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전통 음악으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송의 악기가 전래되기도 하였다. 당악의 영향을 받은 [향악]이 발달하여 [속요]와 어울리는 많은 곡이 만들어졌다. 귀족들은 [차]를 음미하고 차 문화를 향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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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문제와 해설 】


?1. (가), (나)의 불상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가)는 불교계에서 결사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에 조성되었다.


② (가)가 있는 사찰에는 고려 시대에 세워진 목조 건축물이 남아 있다.


③ (나)는 불상의 양식 면에서 석굴암 본존불에 영향을 끼쳤다.


④ (나)가 있는 사찰에는 고려 시대에 제작된 조사당 벽화가 남아 있다.


⑤ (가)와 (나)는 미래불의 출현을 염원하는 미륵 신앙과 관련이 깊다.

?* 2012학년도 6월 모의평가 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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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정답 ④

④ 부석사에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벽화인 조사당 벽화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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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 기록 유산이 간행된 시기의 역사적 사실로 옳은 것은?


①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다.


② 풍수지리설에 따라 한양을 남경으로 승격시켰다.


③ 청자 제작에 활용된 도강적인 상감법이 개발되었다.


④ 광주 춘궁리 철불을 비롯한 대형 철불이 조성되었다.


⑤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4,700여 권의 전적을 간행하였다.

?* 2012학년도 수능 1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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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정답 ①

① 화통도감은 “직지심체요절”의 간행과 같은 해에 최무선의 건의로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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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 문화 유산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거란군의 격퇴를 염원하며 제작되었다.


② 단군신화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책이다.


③ 불국사 3층 석탑 수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④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다.


⑤ 유교적 합리주의에 바탕한 기전체로 서술되었다.

?* 2015년 6월 모의평가 1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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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정답 ④

제시문은 “직지심체요절”에 대한 내용이다.

④ “직지심체요절”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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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에 들어갈 사례로 옳은 것은?


① 석굴암의 본존불


② 강서 대묘의 사신도


③ 상감 기법이 적용된 청자


④ 주심포 양식의 부석사 무량수전


⑤ 정혜 공주 묘의 모줄임천장 구조

* 2015년 9월 학력평가 1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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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정답 ⑤

⑤ 정혜 공주 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천장 구조는 고구려 고분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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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답 풀이>


① 통일신라 ?② 고구려 ?③ 고려 ? ?④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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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도는 고려 전기의 대외 무역을 나타낸 것이다. (가)~(다)와의 무역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가)로의 주요 수출품은 금, 은, 화문석, 인삼, 먹 등이었다.


② (가)의 상인을 통해 고려라는 이름이 서방 세계에 알려졌다.


③ (나)오의 무역이 대외 무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④ (나), (다)는 농기구, 식량 등을 가지고 와서 은과 바꾸어 갔다.


⑤ (다)와의 무역은 사무역이 공무역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 2007학년도 6월 모의평가 2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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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정답 ①

지도에서 (가)는 송, (나)는 요, (다)는 여진이다.

고려는 송에 금, 은, 인삼, 종이, 화문석, 나전칠기 등을 수출하고, 서적, 비단, 약재, 자기 등을 수입하였다. 요(거란)에는 공기구, 곡식 등을 수출하고, 은, 모피, 말 등을 수입하였다. 여진에는 곡식을 수출하고, 은, 모피, 말 등을 수입하였다.

① 고려는 송에 금, 은, 화문석, 종이, 인삼 나전칠기, 먹 등을 수출하고, 비단, 약재, 자기, 서적 등을 수입했다.

?* 2016학년도 9월 모의평가 1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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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에 들어갈 작품으로 적절한 것은?

* 2014년 9월 학력평가 1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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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정답 ⑤

⑤ 민화는 조선 후기의 서민 문화 발달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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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답 풀이>


① 통일신라 시대 석탑인 불국사 3층 석탑이다.


② 고려 시대 불상인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이다.


③ 고려 시대의 상감 청자이다.


④ 고구려 고분벽화 <수렵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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