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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뚝심 있다고요? 무서워서 ‘양들의 침묵’도 안 봤는데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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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배우는 배우는 사람’ 연기 31년 배종옥

“정말 공포영화 싫어하나요?” “예, 그렇다니까요.” 느닷없이 호러 영화를 꺼내 든 건 배우 배종옥(52)의 에세이집 『배우는 삶, 배우의 삶』에 나오는 한 대목 때문이다. 배씨는 책에서 “무서운 작품은 싫다”며 매니저와 시나리오를 놓고 실랑이를 벌였던 일화를 소개했다. “‘양들의 침묵’을 여태 안 봤어요. ‘살인의 추억’ ‘쉰들러 리스트’도 마찬가지고요. 공포영화를 보면 그 잔상이 저를 오래 괴롭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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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옥도 50대에 접어들었다. 그만큼 여유가 붙은 것일까. “40대에는 너무 바빴다.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서처럼 삶의 어느 한순간 세수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사는 자유를 누리고 싶다”고 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살인의 추억’도 공포물인가요.
“그래도 힘들어요. 영화를 보면 세상이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말이죠. 요즘 한 잡지에서 영화 대담을 하고 있는데 ‘부산행’에 별 한 개밖에 주지 않았어요. ‘곡성’도 봤는데 얼마나 찝찝하던지…. 어릴 적 ‘엑소시스트’ 이후 호러 영화는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보고 나면 악몽을 꾸기 일쑤죠.”

의외였다. 또렷한 말투, 깐깐한 인상, 이지적 이미지로 이름난 배씨이기에 그렇다. 1985년 드라마 ‘해돋는 언덕’으로 데뷔한 이후 벌써 31년, 이제는 뚝심과 결기의 배우로 자리 잡은 그이지만 이런 빈틈이 있었다. 책 또한 뜻밖이다.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온 그가 30년 연기 인생을 열어젖혔다. “요즘 촬영 현장에 가면 가장 나이가 많다”는 그가 스스로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던 것일까. “낯을 많이 가린다”는 겸양과 달리 그만의 보따리를 술술 풀어놓았다.

갑자기 웬 책입니까.
“나문희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배종옥, 이젠 책까지 썼니. 공부 좀 그만해라’고요.(웃음) 그간의 경험을 후배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죠. 저도 처음부터 연기를 잘한 배우가 아니잖아요. ‘책을 읽는다’ ‘시청률 떨어진다’ 항의 편지도 많이 받았고요.”
좋은 연기가 따로 있나요.
“배우의 첫째 조건은 말하기입니다. 기본 중 기본이죠. 말을 잘하면 귀가 시원해지고 연기도 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즘 아이돌 스타나 가수가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데 이 간단한 것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비주얼로만 승부하면 발전이 없습니다.”
스스로도 예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외모도, 재능도, 배경도 없이 시작했죠. 방송국에 가면 쥐구멍을 찾고 싶을 뿐이었어요. ‘왕룽일가’(1989), ‘행복어 사전’(1991), ‘거짓말’(1998) 등을 거치며 제 문제점을 알게 됐어요. 발걸음, 눈빛, 목소리, 캐릭터 분석 등을 하나하나 공부했습니다. ‘거짓말’ 때 처음 만난 노희경 작가가 엘리베이터에서 제 목을 조르며 ‘연기 좀 잘해요”라고 한 건 유명한 일화죠.”
노 작가의 단짝으로 불립니다.
“‘거짓말’을 계기로 저도 거짓말처럼 달라졌습니다. ‘바보 같은 사랑’ ‘굿바이 솔로’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등에서 함께했죠. 2002년 제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이후 방황하던 저를 법륜 스님이 하는 정토회 마음공부 모임에 소개해 준 친구이기도 하고요.”
어머니가 호프집도 하셨더군요.
“이번에 엄마에 대한 얘기를 처음 공개했어요. 94년 이혼하면서 남은 제 딸을 잘 키워주셨죠. 여장부셨습니다. 고3 때던가, 공부하던 저를 불러 생맥주 500㏄와 튀긴 닭다리 하나로 하루 피로를 푸시곤 했어요. 임종 일주일 전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던 말씀에 지금도 울컥합니다.”
딸로서, 어머니로서 점수를 매긴다면요.
“딸로선 50점이나 될까요. 우리들은 왜 부모님이 곁에 있으면 잘해드리지 못할까요. 엄마로선 모르겠어요. 딸이 ‘엄마를 존경한다’고 말하곤 하지만요….(웃음)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딸은 요즘 국내 로스쿨 진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홀로 사는 게 외롭겠습니다.
“앞으로 남자 친구가 생길지 모르지만 지금은 혼자 있는 게 편합니다. 일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이것 혹시 큰일 난 건가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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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옥은 국내 배우 출신 박사 1호다. 그가 출연한 ‘천하일색 박정금’을 중심으로 ‘텔레비전 게시판 반응과 제작 구성원의 상호작용 연구’로 2009년 고려대에서 학위를 땄다. 그를 지도했던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에게 대학원 시절 배씨에 대해 물어보았다. 김 교수는 “(배종옥은) 정답만 쓰는 학생”이라고 기억했다. “학기 중에는 방송을 뚝 끊었다.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한다. 공과 사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연기 하나만 해도 벅차지 않나요.
“학구형은 아닙니다. 배우들도 공부하면 연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제가 연기를 왜 하는지 질문과 대답이 필요했습니다. 덕분에 드라마를 보는 눈이 넓어졌어요.”
교수 제안도 뿌리쳤다고 합니다.
“교수가 되려고 공부를 한 게 아니니까요. 네댓 군데서 요청이 왔는데 다 거절했습니다. 주위에서 의아하게 생각했죠. 끝까지 좋은 배우이고 싶습니다. 정신이 흩어지면, 머리를 너무 쓰면 연기에 방해를 받거든요.”
중앙대에서 10여 년 지도했는데.
“50대에 들어 그만두었습니다. 배우에 몰입하려고요. 드라마·영화·연극 등 매체에 따른 연기를 가르쳤죠. 한국은 할리우드에 비해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부족합니다. ‘거짓말’ 이후 미국에 연수를 간 것도 그런 갈증에서였고요.”
뉴욕이 ‘제2의 고향’이라고 했어요.
“국제 금융위기로 6개월 정도 있었지만 제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죠. 연기 공부도 공부지만 뮤지엄에 자주 다녔습니다. 자신을 끝없이 발전·확장하려고 애쓰는 예술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일례로 ‘티파니 회고전’을 봤는데 그는 단지 보석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 전에 인테리어도 하고, 그림도 많이 그렸더군요.”
평소 그렇게 진지한 편입니까.
“나이 때문일까요. 요즘엔 좀 편해지려고 해요. 최근 ‘복면가왕’에도 나갔잖아요. ‘룸메이트’에도 출연했고요. 예전에는 오락 프로를 멀리했습니다. 이젠 젊은 사람과 자유롭게 어울리고 싶어요. 코믹한 캐릭터도 하고 싶고요. 16년 전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이후 코미디는 거의 하지 않았죠.”
이달 말 연극 ‘꽃의 비밀’을 올립니다.
“코미디입니다. 매일 술을 마시는 억센 주부로 나와요. 지난해 초연됐는데 캐릭터가 너무 재미있어 장진 연출가에게 다음번에는 꼭 제게 맡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걸 왜 하지’ 할 만큼 연습은 힘들지만 집에 가서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져요. 영화 ‘환절기’도 내년 초 개봉합니다. 분위기가 연극과 매우 달라요. 중년 여성의 성장기입니다.”
매일 108배를 한다고 들었어요.
“하루를 108배로 엽니다. 어머니 타계 이후 시작했어요. 그날그날 저를 돌아보죠. 처음엔 200일 정도 예상했는데 벌써 10년 넘게 지나갔네요. 무언가 하루 한 시간이라도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한 시간의 기적’이라 불러요. 자신에 대한 믿음, 신뢰가 생깁니다. 남는 시간에 주로 고전을 읽습니다. 최근에는 니체에 빠졌어요.”
니체라고요? 너무 높은 산입니다.
“아직 입문서 한 권을 읽은 수준이지만 공감하는 바가 많아요. 카톡 상태 창에도 ‘지금의 삶을 다시 한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는 니체의 말을 옮겨놓았죠. 배우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으로 이뤄진다고 믿습니다. 니체도 그랬어요. ‘재능이 없다고 슬퍼하지 마라. 습득하면 된다’고. 지금 우리에게 하는 말 같지 않나요.”
배우 아니면 뭐가 됐을까요.
“글쎄요. 어린 시절 워낙 존재감이 없어 배우가 되겠다고 하니까 모두 반대했던 터라서…. 아마 국어 선생님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것도 딱딱하고 재수 없는 선생님이요.”(웃음)

[S BOX] ‘소피의 선택’ 여배우 메릴 스트리프가 롤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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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옥에게 “20년 뒤의 본인 모습을 상상해 달라”고 청했다. 흰머리 날리는 70대에 어떤 배우로 남고 싶은지 궁금했다. 그는 “저만의 독특한 세계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재차 물었다. “독특한 세계라면요?” “말로 표현하기 어렵죠. 다만 대학교 때부터 롤 모델이 메릴 스트리프(사진)였어요. 욕심이 너무 큰가요.(웃음) 꼭 그 같은 배우가 되겠다는 뜻은 아니고요.”

그는 메릴 스트리프에 대해 ‘역시 대체 불가’라고 평했다. 배우로서의 지향점이 짐작됐다. “한 세기에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하는 배우입니다. 내로라하는 연기자가 몰리는 할리우드지만 그가 아닌 다른 배우는 상상할 수 없어요. 여배우는 꼭 예뻐야 한다는 편견도 깼고요. 대학 4학년 때 본 ‘소피의 선택’ 충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배종옥은 이번 책에 ‘그만의 배우론’을 펼쳐 놓았다. 정확한 영어를 구사하는 제프리 러시, 한창 잘나갈 때 연기를 접고 6년간 구두를 만들었던 대니얼 데이루이스, 주인공뿐 아니라 작은 역할에도 충실한 케이트 블란쳇을 불러들였다. 한국 배우로는 이순재·나문희·윤여정에게 헌사를 바쳤다. 모두 연기 외길을 걸어온 대선배요, 선생님이다. “젊어서는 배우를 선택이라고 봤어요. 그 선택이 쌓여 천직, 나아가 운명이 된 것 같습니다.”

글=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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