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배우 윤정희 선생의 손거울

중앙일보

입력 2016.10.3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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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윤정희 선생이 손거울을 꺼냈다.
사진을 찍기 전 아이라인이라도 그려야겠다며 꺼낸 화장용 손거울이었다.
그 손거울에 뭔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다가가서 자세히 보았다.
어렴풋했던 그 무엇, 바로 스카치 테이프였다.
오십 년 배우 아니던가!
더군다나 우리는 그녀의 이름 앞에 ‘대배우’란 수식어를 붙인다.

그런 그녀가 꺼낸 손거울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그래서 물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겁니까?”
“아주 오래되었죠, 스카치 테이프를 붙이고 다닐 정도니….”

다른 손에 뭔가 쥐고 있는 게 보였다.
움켜쥔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윤 선생이 손거울을 보며 움켜쥐었던 것을 바로 잡을 때야 알 수 있었다.
바로 아이라인 펜슬이었다.
마치 몽당연필 같았다.
움켜쥐었을 때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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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그 모습 그대로 사진을 찍을게요.”
“부끄러워요. 손도 안 이쁘잖아요. 설거지도 맨손으로 해요. 장갑 끼면 답답해서요.”
“새끼 손가락에 낀 반지는 결혼 반지 아닌가요?”
“맞아요. 이젠 손가락도 굵어져서 새끼 손가락으로 옮겼죠.”

윤 선생이 반지를 빼서 약지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
그런 후 “보세요”라며 내게 보여줬다.
손가락의 살이 부풀어 올랐다.
다시 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내게 보여준 이유는 무엇일까?
구태여 묻지 않았지만 이유가 짐작이 갔다.
그래도 그 모습 그대로를 사진으로 꼭 찍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배우로서 늙는 모습 그대로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제겐 지금 선생님의 모습이 그 무엇보다 감동입니다.”

50년 동안 배우를 하면서 그만 두고 싶은 적은 없었냐는 취재기자의 질문에 윤선생이 이렇게 답했었다.
“한 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요. ‘가다가 아니 가면 아니 간만 못 하다’는
말을 항상 되뇌며 삽니다. 영화란 게 인생을 그려내는 거잖아요. 늙는 모습 그대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할 겁니다.”

‘늙는 모습 그대로’란 말이 가슴에 와 닿았던 터였다.
그래서 그 말을 적어두기 까지 했었다.

말을 꺼내며 걱정이 들긴 했다.
혹시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때였다.
인터뷰 내내 배석했던 안규찬씨가 한 마디 했다.
그는 팬클럽 회장이자 영화평론가였다.
“선생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윤 선생이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그럼 머리라도 빗고 찍죠.”

윤선생이 손가방을 뒤졌다.
“어머! 빗이 없네. 요새 내 정신이 이래요. 어제 사진 찍었더라면 좋았을 걸. 어젠 머리를 감았는데…. 백 선생이 머리 잘라주고 제가 구르프 말고 그렇게 살아요. 사실 그래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하늘 나라에 갈 때까지 보여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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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끝에 윤 선생이 손으로 머리를 다듬었다.
그렇게 그녀는 카메라 앞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섰다.

이때가 지난 9월이었다.
사실 그 전까지 윤 선생을 세 번 만났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의 동반자였다.
단 한 번도 그녀가 주인공인 적이 없었다.
백건우 선생의 동반자가 아닌 배우 윤정희로서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데뷔 50주년 특별전 ‘스크린, 윤정희라는 색채로 물들다’를 앞두고 있었기에 만난 것이었다.

윤 선생이 오십 년 전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세월이 참 빠르네요. 벌써 오십 년이 되었네요. ‘청춘극장’ 주연공모에 나선 게 시작이었어요. 1966년이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돌려 보며 원작의 주인공인 오유경에 빠졌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섰죠. 그런데 결승을 앞두고 주인공이 이미 내정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자존심이 상해서 뛰쳐 나가버렸어요. 그때 두 남자가 달려와 나를 붙들었어요.  제작부장과 카메라 감독이었어요.카메라 테스트가 “어머니” 하며 우는 장면이었는데 진짜로 울어버렸습니다.그 바람에 된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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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팬클럽 회장이 이야기를 거들었다.
“’청준극장’이 이번 특별전에 공개됩니다. 홍콩에서 발굴된 필름인데요. 중국말로 더빙된 것입니다. 더빙이라 아쉽긴 하지만 이 자체도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라 생각해야죠. 저는 보고 왔습니다만 선생님께선 아직 못 보셨죠?”

“이번에 보게 되면 오십 년 만에 보게 되는 거잖아요. 제겐 무엇보다 애틋한 거니 설렙니다. 다 저 사람들 덕이예요. 이런 사랑 때문에 계속 연기할 용기가 나는 겁니다.”

그는 “아닙니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18년 전쯤 영화모임을 하다가 윤 선생을 초대하게 된 계기로 첫 인연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다 2004년부터 팬클럽 회장을 맡아 윤 선생의 40주년 기념 특별전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번 50주년 특별전 또한 그가 기획하여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를 한 것이라고 했다.

팬으로서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 그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배우 윤정희 선생의 진면목을 본 것일 게다.
스카치 테이프로 붙인 손거울, 몽땅한 펜슬, 백건우 선생이 자르고 윤 선생이 직접 구르프한 머리에서 감동을 받았을 테다.

팬과 배우의 각별한 우정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그래서 기념사진을 찍어 주고 헤어졌다.
돌아오는 내내 손거울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예전 사진을 뒤져 보았다.
모두 세 개의 폴더를 찾았다.
2013년9월3일, 2011년11월29일, 2011년04월26일 폴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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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순으로 폴더를 열어 사진을 보았다.
2013년 9월이었다.
인터뷰 공간이 협소한데다 식사를 하며 짬을 내 인터뷰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에 나란히 있던 윤 선생이 갑자기 일어났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조그만 보조의자에 앉았다.
자리를 비켜나지 않아도 된다고 했건만 윤 선생은 손사래를 치며 그리했다.
편하게 인터뷰에 집중하라는 배려였다.
자신은 백건우 선생의 동반자일 뿐 이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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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의 사진에선 윤 선생이 백선생의 머리를 빗겨주는 장면이 있었다.
인터뷰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창 밖에서 목격한 장면이었다.
유리창을 통해 몰래 본 모습이었다.
창에 그려진 문양이 시선을 방해했지만 그렇게나마 엉겁결에 찍었다.
이날도 윤 선생은 여느 때처럼 백 선생의 동반자로 멀찍이 떨어져 인터뷰를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2011년 04월 사월의 사진은 처음 만났을 때였다.
당시 윤 선생은 얼굴에 병색이 완연했다.
원래 인터뷰는 하루 전에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윤 선생이 응급실로 가야 할 상황이 발생하여 인터뷰가 하루 미루어진 터였다.
이날 윤 선생은 병색이 완연한데도 인터뷰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인터뷰 후 사진 촬영을 준비할 땐 윤선생이 백 선생의 옷 매무새까지 만져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백 선생에게 물었다.
“늘 이렇게 함께 하십니까?”
“우린 늘 함께합니다. 연주는 물론 연습, 녹음, 인터뷰 현장, 어디건 붙어다닙니다. 이 사람은 부부요, 친구요, 매니저입니다. 이 사람이 없으면 전 아무것도 못합니다. 저의 모자람을 감싸고 채워주죠.”

백 선생의 답을 듣고 윤 선생에게 사진을 한 장 찍자고 요청을 했다.
“어휴! 제 얼굴이 지금 이 모양인데 사진을 어떻게 찍어요.”

“한국의 어머님들은 소중한 것을 머리에 이고 다니셨잖아요. 제가 보기에 백 선생님을 머리에 이고 사시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한 장 담아 놓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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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곡한 청에 윤 선생이 조명 앞에 섰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 선 윤선생의 표정이 돌변했다.
병색은 온데 간데 없어졌다.
장난스럽게 웃기까지 했다.
천생 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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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사진을 보다가 낯익은 손거울을 발견했다.
백건우 선생이 사진을 찍기 전에 손거울로 얼굴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백 선생의 손에 들고 있는 손거울이 바로 그 거울이었다.
스카치 테이프는 없지만 분명 겉의 문양이 같은 손거울이었다.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이젠 갈라지고 떨어져서 스카치 테이프로 붙였지만 늘 윤 선생의 삶과 함께해 온 손거울이었다.
윤 선생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영화란 게 인생을 그려내는 거잖아요. 늙는 모습 그대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할 겁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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