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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셀프서비스·DIY가구…여가 빼먹는 ‘시간 도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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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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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노동의 역습
크레이그 램버트 지음
이현주 옮김, 민음사
336쪽, 1만6000원

직접 기름 넣는 주유소, 가구 조립 등
착한 소비자의 ‘그림자 노동’ 해부
주유원·캐셔·점원 일자리 잃는 건
자발적인 셀프 노동 탓이라 분석

“시간은 돈이다(Time is money).”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이 한 이 말을 우리는 보통 비유적·상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말이 탄생한 미국에서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우리나라보다 더 많은 것 같다.

시간이 돈인 이유는 시간을 들여 일을 하면 돈을 받기 때문이다. 『그림자 노동의 역습』은 우리가 얼마만큼 알게 모르게, 게다가 점점 더 많이 공짜로 일하고 있는지 그 실상을 드러낸다. 가사 노동을 비롯해 모든 무임금노동을 지칭하는 ‘그림자 노동(shadow work)’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반 일리치(1926~2002) 신부다.

기업은 직원들을 해고하거나 더 이상 새로 뽑지 않고 직원들이 하던 일을 소비자들에게 떠 넘긴다. 저자 크레이그 램버트가 들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기름을 직접 넣어야 하는 주유소, DIY(Do it yourself, 네가 직접 해라) 가구다. DIY 가구 조립은 물론 뿌듯함을 맛볼 기회를 준다. 좀 나쁘게도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DIY가 마치 굉장한 선진 트렌드이기나 한 것처럼 안 해도 되는 노동을 자발적으로 하고 흡족해 하는 ‘바보’다.

저자는 ‘중산층 농노제(middle-class serfdom)’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그림자 노동은 일과 여가의 구분을 지워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야금야금 일상을 잠식하는 그림자 노동 때문에 우리의 하루는 과부하 상태다. 자동화는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여가 시간을 가져와야 하는데 그 반대다. 바둥바둥 사는 데도 항상 시간에 쫓긴다. 늘 잠이 부족하다. 원인의 일부는 그림자 노동이라 불리는 ‘시간 도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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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고 하는 노동 외에도 무임금으로 봉사하는 셀프 주유·DIY가구 조립 등 ‘그림자 노동’으로 넘쳐난다. [사진 민음사·중앙포토]

그림자 노동은 개인을 넘어 ‘사회적’인 문제다. 기업을 대신해 일해주는 ‘착한’ 소비자 덕분에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점원, 비서, 주유원, 여행사 직원, 캐시어가 멸종 위기 직업이 됐다. 저자는 세계 인구의 17퍼센트인 15~24세 젊은이들이 실업인구의 40퍼센트를 차지한다는 통계를 인용한다. 그림자 노동으로 말미암아 이들을 위한 일자리는 갈수록 줄게 돼 있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식당에 붙어 있는 ‘물은 셀프’라는 말도 그림자 노동의 좋은 사례다. ‘셀프 노동’의 영역은 앞으로 더욱 확장될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그림자 노동은 잡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잡일은 귀찮은 일일 뿐이다. 미국 문화에서는 잡일조차 돈 문제와 결부한다는 것을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 예시한다. 저자는 하루에 스팸메일을 지우는 데 1~2분 밖에 안 걸린다고 하더라도 일년이면 9시간에 달한다고 지적한다. 철저한 시간 관념이다.

우리 정서로는 ‘너무 야박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예컨대 구내식당에 가면 음식 찌꺼기를 한 그릇에 몰아달라는 요청이 있다. 이 또한 그림자 노동이지만 일하는 타인의 수고를 덜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저자는 우리가 그림자 노동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책은 사람을 ‘의식화’ 시킨다. ‘전사’로 만들기도 한다. 『그림자 노동의 역습』은 노동과 즐거움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 책에 대해서는 ‘무임금 노동의 구조를 분석했을 뿐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의견과 ‘그렇지 않다. 제공한다’는 의견이 갈린다. 우리는 그림자 노동에 안돼요·싫어요라고 할 수 있을까.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고 하는 것은 독자에게 그림자 노동을 부과하는 것일까.

[S BOX] ‘물 셀프’ 고객에 100원씩 돌려주는 식당 창업한다면…

조만간 중국 식당에서도 ‘종지·그릇은 셀프’라는 안내문이 붙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11월 한 신문 컬럼에서 시작한 ‘간장 두 종지’ 사건은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 노동’이 대세라도 이를 역이용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수 있다. DIY 가구를 조립해 배달해주는 비즈니스는 어떨까. ‘물은 셀프’이지만 대신 100원씩 돌려주는 식당이 있다면 큰 화제가 되지 않을까. 고용창출을 위해 자동화의 공습이 시작되기 전인 50~60년대 식으로 매장을 운영하면 어떨까. 셀프 주유를 접고 고학생 아르바이트를 고용하는 주유소도 관심을 끌 것이다. 가격을 인상하더라도 소비자가 있을 것이다. 그림자 노동이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격 인하라는 인간의 이기심도 있지만, 좀 번거롭더라도 따지지 않고 해주는 ‘착한’ 심성도 있다. ‘그림자 노동의 역습’에 반격하는 비즈니스 모델 또한 사람의 선함을 기반으로 한다.

김환영 논설위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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