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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마라, 너희가 조선이다' 이순신 대사엔 저도 울컥했어요"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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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 조선까지 9편의 사극 출연, 역사 속 영웅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은 작업 펼쳐와… 최근 <임진왜란 1592>에서는 인간미 넘치는 가장(家長)으로서의 이순신 연기 감동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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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나이가 무색할 만큼 동안(童顔)에다 선한 인상을 심어주는 쌍커풀을 가진 최수종(54). 얼핏 봐선 사극에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는데도 굵직한 사극에는 어김없이 그가 등장한다. 최근에는 <임진왜란1592>에서 이순신 역을 맡아 다시 한번 연기혼을 불태웠다. 최수종이 연기자로서 대면해온 사적 영웅들의 인물론, 사극을 해오면서 얻은 인생의 지혜를 직접 들어보았다.

‘사극(史劇) 국민배우’ 최수종의 30년 연기 인생

몇년 전 KBS <개그콘서트>에서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코너로 유명한 개그맨 최효종 씨가 배우 최수종을 두고 이런 개그를 한 적이 있다. 최효종은 ‘사극을 정해주는 애정남’이라는 주제를 꺼낸 뒤 ‘사극에 출연 해서는 안 되는 배우’로 최수종을 꼽았다. 최씨가 사극에 너무 자주 나와 시청자들이 발해를 건국한 사람이 대조영인지, 해신 장보고인지 헷갈린다는 이유의 우스갯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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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최수종은 1980년대 후반 대표적인 청춘물인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 출연해 부드럽고 잘생긴 외모의 하이틴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서울뚝배기> <질투> <아들과 딸> <파일럿> <첫사랑> 등 현대물에 주로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는 사극전문 배우라는 강한 이미지를 갖게 됐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30년 배우 인생 중 고작(?) 9편의 사극에 출연했을 뿐인데 말이다.

사극 배우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데는 그의 출연작 대부분이 높은 시청률로 성공을 거둔 게 큰 이유다. 게다가 신라에서 조선까지 1500년 가까운 시대를 넘나들며 각 시대의 주요 역사 인물을 두루 연기한 배우로 그 이외의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배우 최수종을 두고 “이제 고조선의 단군역만 맡으면 완벽한 역사책 한 권이 완성된다”는 또다른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그는 최근 종영한 KBS ‘팩츄얼드라마’ <임진왜란 1592>(5부작)에서 우리 역사 최고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이순신장군 역을 맡아 사극 배우로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2012년 <대왕의 꿈>에서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을 이룬 무열왕 김춘추역을 맡은 후 한동안 사극 출연을 자제(?)해온 그는 이순신역 제의를 받고 거절할까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사극 배우 이미지가 너무 굳어진 데다 배우로서는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다큐식 사극, 일명 ‘팩츄얼드라마’ 형식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1592>에서 이순신 장군 역할을 맡으셨죠. 처음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지난해 늦가을쯤 교양국 다큐멘터리 팀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첫 미팅에서 연출자, 제작자, 촬영감독이 모두 나왔는데 ‘최수종 씨가 꼭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동안 사극을 여러 편 하면서 쌓아온 책임감이나 신뢰감 같은 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막상 제안을 받고 보니 사극 제작을 왜 교양국에서 하나 싶기도 하고, 다큐멘터리 형식이라는 말에 의구심이 들었어요. 솔직히 처음에는 안 하려고 마음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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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극 <임진왜란 1592>에서 이순신을 연기하는 최수종. 첫 전투에 선봉으로 나선 이순신이 왜군의 조총에 부상을 당하자 부하들은 선봉에 나서는 일을 만류한다. 하지만 극중 이순신은 “상처 하나엔 깨달음 하나다”는 말로 불굴의 의지를 나타낸다.

어떤 의구심이 들었길래요?
“다큐식 드라마라는 게 팩트를 바탕으로 하고 그 부분이 강조될 텐데 과연 배우의 역할이 어느 정도나 차지하고, 또 얼마나 임팩트 있게 보일까 고민이 됐거든요. ‘팩츄얼드라마’라는 것이 국내에서는 나온 적이 없어서 생소하기도 했고요.”

‘팩츄얼드라마’가 정확히 뭔가요?
“허구가 많이 가미되는 일반적 사극과 달리 역사적 고증을 통해 최대한 사실 그대로 만드는 드라마죠. 아마 한국에서는 이런 형식의 드라마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배우 입장에서 일반 대하사극과 ‘팩츄얼드라마’가 어떻게 다르던가요?
“보통은 작가와 연출자가 인물에 대한 해석을 하고 방향을 잡습니다. 하지만 배우도 나름대로 창의적인 해석을 곁들여 어떻게 연기할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되죠. 그런데 ‘팩츄얼 드라마’는 일단 배우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보다는 제작진(PD)의 설명을 들어야 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어요. 허구적 내용보다 역사적 고증 대로 표현한다는 게 배우 입장에서는 더 힘들지 않았나 싶어요.”

다른 부담은 없었나요? 이순신은 이전에도 몇 차례 드라마와 영화에서 다룬 인물이었잖아요?
“김명민 씨가 출연한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최민식 씨의 영화 <명량>, 두 작품이 모두 크게 히트했죠. 두 분이 연기한 이순신이 사람들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잖아요. 그들과 비교될 수도 있으니 걱정이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형식 자체가 달라서 앞으로 10년, 20년 후 시청자들이나 이쪽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들, 그리고 후배 배우들에게 교과서와 같은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화면(영상)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역사교과서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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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꼬박 외운 대사가 본방에서 빠져 서운했죠”

PD가 특별히 요구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있었나요?
“김한솔 PD가 자주 연락을 해왔어요. 그동안 백전백승을 거둔 위인이자 영웅으로서 묘사된 이순신과는 또 다른 이순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하더군요.”

‘또 다른 이순신’이라니요?
“40대 중반에서 50에 이르는 우리 시대 ‘가장(家長)’의 모습이 잘 드러났으면 한다는 겁니다. 영웅이고 위인이기 이전에 고뇌하고 아파하는 그런 모습이 잘 표현돼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가령 전투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결과를 장담할 수 없어 힘들어하는 인간적인 부분이 잘 표현돼야 했고요. 밖에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 와서는 가족들에게 그런 것들을 알리고 않고 혼자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그런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어요.”

영웅이 아닌 가장으로서의 모습이 표현된 대목이 있다면요?
“장군이 돌격대장 이기남, 귀선(거북선) 제작자 나대용 등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어요. 엄격한 지휘관으로서가 아닌 마치 아버지와 같은, 또 형님과 같은 모습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워 하는 부하들에게 따뜻한 인간미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비치도록 노력했어요. 시청자 역시 그런 느낌을 받으셨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촬영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요?
“이순신 장군이 최하층 노비에서부터 부하 장수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직함과 이름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고 부르면서 일기에 그들을 기록하는 장면을 촬영했어요. 직함, 이름을 모두 외우느라 일주일을 꼬박 보낸 것 같은데 정작 TV 방영분에서 그 장면이 빠졌더군요. 분량도 꽤 됐는데요. 가령 귀선을 만들고 제작한 사람, 돌격대장, 노 젓는 사람, 어느 지역에서 온 장졸 누구누구 이런 식으로 기억하며 기록을 하는 장면이죠. 여기서 이순신 장군은 자신을 그들보다 낮추고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 바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앞세웁니다. 또 왜적의 총에 맞아 피가 터지고 심각한 상황인 데도 주변을 물리치고 부하 한 명만을 불러 묵묵히 치료 받는 장면도 있습니다. 고통을 굳이 여럿에 알리지 않고 혼자 감당하려는 장군의 뜻을 표현한 대목이죠.”

이번 드라마를 통해 이순신 장군은 어떤 리더로 느껴졌나요?
“장군이 판옥선의 사령탑보다는 갑판에 내려와 활을 들고 진두지휘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김한솔 PD의 말을 빌리자면 그분은 절대 위에서 명령만 내리는 분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거죠. 장군이 기록한 일기를 보면 그런 장면이 그려진다는 거죠.”

드라마 속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일치할까요?
“사실(팩트)적 묘사가 90%를 훨씬 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전투 장면에서도 드러나는데요. 장군이 거북선을 만든 이유 가 당시 왜군이 흔히 쓰는 전술에 대비하기 위해서였거든요. 먼 거리에서 함포로 적선을 파괴하는 게 아니고 최대한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 직사포로 배를 부수는 것이 당시 조선 수군의 실제 전술이었다는 거죠. 칼을 차고 왜적과 대면해 싸우기보다는 직사포로 함선을 파괴하면서 가까운 거리에서 활로 적병을 공격하는 거죠. 그래서 이순신 장군이 칼을 차고 있는 장면보다는 활을 쥐고 지휘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화제가 된 대사가 있었죠?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을 앞두고 장군이 부하들에게 당부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길게 치는 대사가 있어요. 그 한 대목이 ‘죽지 마라. 너희가 죽으면 내가 죽는다. 너희가 죽으면 너희 가족이 죽는다. 너희가 죽으면 조선이 죽는다. 나에게는 너희가 조선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보통은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다’는 식의 비장한 내용이 익숙할 텐데 이번 드라마에서 장군의 대사는 달랐어요. 마침 촬영장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이런 대사를 치는데 한 번의 NG도 없이 OK가 났어요. 대사를 하면서 울컥하며 속에서 뭔가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어요.”

‘너희가 바로 조선이다’ 같은 대사는 어떤 상황에서 나온 건가요?
“이순신 장군이 군졸, 장수들에게 ‘우리는 왜 싸우는가,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라는 질문을 마지막 출정을 앞두고 던지죠. 자신과 가족과 나라를 생각하면 죽지 말고 이기라는 거에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조선이기 때문에 너희가 죽으면 조선이 죽는다는 거죠. 가슴에 팍 하고 꽂히는 뭔가가 있었어요.”

그런 대목에서 NG가 나고 반복 촬영을 하면 다른 느낌이 드나요?
“결정적 장면을 찍다 보면 현장의 분위기라는 게 있는데 NG가 반복적으로 나다 보면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그 감동이 반감될 수 있어요. 이 대사를 외우면서도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감탄했거든요. 다행히 NG없이 한번에 촬영을 마칠 수 있어 감동이 배가 됐던 것 같습니다.”

이번 이순신은 영웅, 위인의 모습보다는 고뇌하고 아파하는, 마치 요즘의 40~50대 가장의 모습으로 그리고자 했어요. 밖에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 와서는 가족들에게 그런 것들을 알리지 않고 혼자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그런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어요.”

“15년 전만 해도 <고려사> 드라마는 파격”

이전 사극에서 맡았던 인물들과 비교해 목소리 톤도 좀 다르게 해야 하지 않았나요?
“지금까지 연기해 온 다른 시대의 장군이나 왕과는 달리 좀 더 따뜻하고 편안하게 대화하는 톤을 들려주면 어떨까 PD와 상의하면서 제안도 했어요. 그동안의 영웅, 위인과는 좀 다른 모습으로 시청자에게 다가가야 했으니까요. PD 역시 장군의 목소리에 한과 아픔이 서려 있도록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신라시대 장보고가 등장하는 해신,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에도 출연했어요. 두 인물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아 연기하는데 애먹지는 않았나요?
“그동안 했던 사극 중에 역사적 자료가 가장 없었던 것이 <해신>의 장보고였습니다. <대조영>도 마찬가지였고요. 어떻게 인물을 그릴지 정말 고민스러웠는데 연출자가 ‘그 시대를 살
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냥 역할에 푹 빠져서 표현하는 게 제일 맞다’고 얘기하더군요. 또 시대상은 다르지만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특히 사람의 감정을 표현할 때는 더 그렇죠. 좋아하고 타협하고 화내고 하는 상황에서는 그 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죠. 물론 자료가 많이 없기 때문에 배우 스스로 창의적 인물 표현을 위해 많이 고민해야 하는 건 분명하고요.”

벌써 15년이나 흘렀는데도 <태조왕건>을 사람들이 많이 기억하는 거 같아요.
“그 당시(2000년)만 해도 우리나라가 사극을 하면 조선왕조 500년 안에서 소재를 찾았거든요. 1000년 전인 고려사를 다룬 것 자체가 파격적이었던 시절이었죠. 또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장기간 방송이 된 드라마라 저 역시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저한테도 본격적인 사극 배우의 시작이나 다름없는 작품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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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종의 사극 출연작 중 가장 오랫동안 방영된 <태조왕건>(2000년~2002년)에서 궁예(김영철 분)가 등장한 신.<태조왕건>은 최수종을 본격 사극 배우로 만든 대표작이다.

고려와 발해를 각각 창업한 왕건과 대조영을 연기할 때 두 인물은 어떻게 다르게 표현했나요?
“왕건과 대조영은 확연히 차이가 나는 인물이에요. 왕건은 외유내강형의 인물이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부터 정치인(왕)을 꿈꾸는 엘리트로 자랐어요. 반면 대조영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면서 뭔가를 이루겠다는 강한 욕망과 욕구를 갖고 살았던 인물로 묘사가 됐어요. 왕건은 어떤 사람을 만나도 먼저 고개를 숙임으로써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게끔 감싸 안는 부드러운 리더십을 가졌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마냥 부드럽고 착한 게 아니고 때로는 냉혹한 부분도 있는 인물이죠. 대조영은 겉으로 드러나는 욕망이 강하다 보니 주위사람들을 강하게 통솔하고 일을 도모해가는 그런 리더십을 보여주죠. 나라를 세운 공통점이 있는 인물이지만 전혀 다른 성향의 인물로 표현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연기한 역사 인물들의 리더십을 볼 때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이 그분들에게서 어떤 부분을 배워야 할까요?
“흔히 리더가 되고 나면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 같아요. 또 스스로 높아지려고만 하고요. 하지만 부하, 백성들 앞에서 자신을 낮출 줄 알고 겸손하게 다가가는 장면이 무수히 많이 나와요. 그럴 때 비로소 찾아와 진심으로 복종하기도 하고요. 리더가 항상 자기 고집대로만 하고 또 매번 이기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실존 인물을 다루는 사극만의 매력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리 역사와 관련해 특별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거에요. 대조영, 장보고 이런 인물들을 통해 작지만 강하고 위대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사실을 새삼 많이 깨닫습니다. 열강에 치이는 작고 약한 민족이 아닌 강소국의 이미지가 분명 우리 역사 속에 존재하거든요. 바로 그 점이 배우로서 자부심을 갖고 연기하게 되는 동력이기도 하고요.”

“준비 않으면 제2의 임진왜란 올 수도 있죠”

연기하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많이 느끼셨나요?
“사극을 자주 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어요. 대하사극 <대왕의 꿈>에 등장하는 신라의 김춘추 역을 맡았을 때도 그랬고요. 김춘추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분분하다는 점은 저도 알고 있어요.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외세를 끌어들여 나당연합(신라·당)을 만든 데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도 하잖아요. 역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김춘추라는 인물이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던 당나라에 가서 지략을 펼치고 그들을 설득해내는 외교술은 평가할 만한 것 아닌가 생각해요. 그때나 지금이나 국가를 운영하면서 외교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 역사 속에서 벤치마킹해 지혜를 발휘해야 할 순간이 많은 것 같아요.”

“사극을 통해 뭔가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거죠. 대조영, 장보고 이런 인물들을 연기하면서 작지만 강하고 위대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사실을 새삼 많이 깨닫습니다. 열강에 치이는 작고 약한 민족이 아닌 강소국의 이미지가 분명 우리 역사 속에 존재하거든요.”

그렇다면 <임진왜란 1592>가 주는 메시지는요?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잖아요. 김한솔 PD의 말을 빌리자면 임진왜란 발발 300년 후(1892년)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면 외세의 침입과 압박이라는 위기가 다시 찾아오거든요. 그로부터 300년 후 (아직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역사가 또 반복될 수도 있다는 거죠. 우리가 잘
준비하지 않으면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 1592>는 단순히 흘러간 과거가 아니고 현재적 의미가 있는 거죠.”

사극을 준비할 때 특별히 챙겨보는 자료 같은 게 있나요?
“대하사극은 보통 두꺼운 시놉시스를 받게 되는데요. 그 외에도 감독들이 꼭 읽어줬으면 하는 책, 백과사전 같은 자료를 얘기해주거나 챙겨주기도 합니다. 처음 제안을 받을 때는 하지 않으려고 맘 먹었다가도 그런 자료들을 3~4일 만에 독파하고 나면 굉장한 흥미를 느끼고, 이 역할을 맡게 되면 어떻게 표현할지 구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죠. 매번 힘들게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다음 번에는 하지 말아야지 했다가도 또다시 매달리게 하는 것이 사극이에요.”(웃음)

외모나 이미지로 볼 때 배우 최수종과 사극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도 주는데요.
“사극에 최수종이 캐스팅됐다고 하면 일단 욕부터 하는 분들이 있어요. 짙은 쌍커플에 동글동글한 얼굴로 무슨 왕이나 장군을 하느냐는 얘기가 대부분이에요. 이번에 이순신 역할을 맡았을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막상 방송이 시작되면 그런 얘기들이 점점 사라지다가 드라마 끝날 때쯤에는 없어지더라고요. 사극 배우로서 이런 외모가 단점일 수 있지만 수술을 할 수도 없잖아요. 대사 한 마디 몸짓 하나 연구하고 신경 써서 보여주는 거죠. 그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극복이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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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출연작인 <대왕의 꿈>. 최수종은 이 작품에서 신라 29대 왕이자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연기했다

사극은 특히 대사가 더 어렵지 않나요?
“예전에는 사극을 할 때 대본하고 국어사전을 들고 연습실에 들어갔어요. 대본에는 단어 하나하나에 장음, 단음까지 다 구분해 표시를 해 놓죠. 특히 장음 위에는 동그라미를 쳐놓아 표시를 해요. 요즘에는 스마트폰에 사전을 다운로드 받아서 헷갈리는 장단음을 찾아보곤 합니다. 그리고 가끔 선배들에게 전화해서 특정 부분을 한 번 읽어봐 달라고 부탁 드리기도 해요.”

30년 차 베테랑이 선배들에게 전화해서 대본 읽는 걸 배운다고요?
“한인수, 정욱, 임혁 선배님 같은 분들에게 부탁드리곤 했어요. 저도 사극을 여러 편 하면서 많이 익숙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배울 부분이 있거든요. ‘장음이에요? 단음이에요?’하고 물어보면 선배님들은 제게 ‘이제는 네가 하는걸 굳이 따지고 꼬집을 게 없다’고는 하시지만 그래도 한번 또 들어보면 다르거든요. 그분들의 노하우는 사전을 통해서가 아니고 머릿속에 다 들어있어요. 머릿속이 사전이나 다름없는 분들이에요.”

사극은 아니지만 <프레지던트>라는 작품 속에서 대선 후보로 나와 정치 지도자 역할을 맡았었죠?
“일본 만화책이 원작인 작품이었어요. 일본인 3세가 미국에서 대통령이 되는 내용인데 우리 실정에 맞게 각색을 해서 원작과는 내용이 많이 달라졌어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자기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하는 인물이에요. 나쁜 남자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 것 같아요. 그래도 권위와 힘만 내세우는 그런 정치가가 아닌, 때로는 감성적인 이미지의 정치인, 대통령상을 그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최수종은 극중에서 형제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복역한 뒤 독일로 유학, 그곳에서 재벌가 딸을 만나 결혼한 여당 3선 의원 장일준 역을 맡았다. 민주화 투사 출신으로 재벌가 사위로 들어가 ‘박쥐’라는 손가락질도 받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언변과 추진력을 갖춘 집권여당의 대통령후보 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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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2006년)에서 최수종은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역을 맡았다. 역사 기록이 많지 않아 어느 때보다 창의적 인물 연기를 고민해야 했다고 한다

<프레지던트>에 나오는 명대사가 선거철만 되면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던데요.
“방송 당시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죠. 대통령 경선 후보로서 ‘청년실업’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 참석해 젊은이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었어요. 그때 제가 한 대사가 대선, 총선을 앞두고 반복적으로 인터넷 게시판이나 SNS에 나와서 저도 신기하다 생각했습니다.”

당시 최수종(장일준 역)이 패널로 참석한 청년들에게 “대통령은 누가 만듭니까?”라고 질문하자 한 청년은 “그야 국민이죠”라고 답한다. 그러자 최수종은 “틀렸어요. 대통령은 투표하는 국민이 만드는 겁니다. 세상에 어느 정치인이 표도 주지 않는 사람을 위해 발로 뜁니까”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서 “권리 위에 잠자는 사람은 보호받지 못합니다. 청년실업의 분노와 설움을 오로지 표로써 정치인에게 똑똑히 보여주십시오”라며 연설을 끝맺는다. 유투브 등을 통해 조회수만, 수백만 건을 기록한 장면이었다.

“저 없으면 우리 아파트 안 돌아갈걸요”

사극에서 맡은 인물들이 죄다 영웅이고 ‘바른 사나이’ 이미지이다 보니 정치권에서 때만 되면 출마 제의도 한다던데 사실이에요?
“정치권에서 들려오는 얘기들이 있는 건 맞아요. 그런데 아내(하희라)는 ‘(정치하려면) 도장 찍고 하라’고 해요. 드라마에서라면 몰라도 현실에서 정치에 뛰어든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할 역량과 자질도 안됩니다.”

배우 출신 정치인들도 있잖아요?
“저한테 맞는 옷은 아닌 것 같아요. 대신 남들이 생각지 못하는 그런 일은 하고 있어요.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 입주자대표회 회장직을 맡고 있어요. 제가 없으면 우리 아파트가 안 돌아간다고 보면 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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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종은 30년 연기인생에서 9편의 사극에 출연했다. 영웅들에게 숨결을 불어넣는 연기를 해오면서 그는 우리 역사에 대해서 남다른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골치 아픈 일 아닌가요?
“1년 가까이 돼가는 것 같아요. 몇 개월 동안 제가 사는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직이 공석이었어요. 다들 해봐야 본전이고 골치 아프다고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아파트 관리가 엉망이 되고 안 되겠다 싶었죠. 이 일도 따지고 보면 리더로서 역할을 하는 거죠. 제가 한다고 나섰더니 의외로 주민분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저희 아파트에 의사, 검사, 변호사 분들도 있는데 TV 속에서 자주 보던 사람이 나서서 얘기하는 게 더 친밀하고 신뢰가 가는 모양이에요. 무슨 말 한마디만 하면 손뼉치고 잘 호응해줍니다. 아파트라는 게 다 그렇지만 다들 주민마다 생각이 다르다 보니 해결이 잘 안 되고 골치 아플 때가 종종 있잖아요. 가급적 유연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가정에서 남편, 아빠로서의 모습은 어떤가요?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한 가지는 지켜나가고 있어요. 아내와 아이들에게 말할 때 존대를 해줍니다. 가령 이름을 부를 때도 ‘민서야, 윤서야’ 이렇게 하지 않고 ‘최민서 씨, 최윤서 씨’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돼 지금은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아이들 얘기를 귀 기울여 잘 들어봅니다. 듣는다는 게 참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흥미로운 얘기군요. 혹시 앞으로 사극에서 꼭 해보고 싶은 인물이 있나요?

“특정 인물을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역사적 인물(주인공) 뒤에서 조금은 감춰진 인물일지라도 옆에서 그 인물이 성공하고 돋보이도록 그림자처럼 보좌하는 그런 인물이라면 해 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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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에 방영된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서 최수종은 손창민, 이미연 등과 함께 하이틴 스타로 큰
인기를 누렸다.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인 현대물도 많지만 언제부터인가 최수종에게서는 사극 배우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풍긴다. [중앙포토]

사극은 또 하실 거죠?(웃음)
“한 작품 끝날 때마다 너무 힘들어 더는 사극 안 한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해 왔어요. 그런데 시청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사극에 캐스팅 제의가 들어오면 아마 또 한다고 하지 않을까요.”(웃음)

글 고성표 기자 muzes@joongang.co.kr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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