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7인의 작가전] Deja vu by system #11. 운명(運命)

중앙일보

입력

기사 이미지

경찰서에서 최초목격자 진술을 한 재성은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들어오기 바로 직전 놀이터 수돗가에서 셔츠 깃과 소매 등에 묻은 핏자국과 각종 얼룩을 열심히 지운다고 지웠는데도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좋지 못한 사건을 당하고 온 몰골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뜬눈으로 재성을 기다린 부모님은 그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지 않았다. 눈동자도 잘 마주치지 않은 채, “빨리 자라.”라는 말과 함께 안방으로 들어갔다. 재성은 죄송한 마음에 컴컴한 거실에 서서 한동안 안방 문을 바라보았다. 그쪽에 대고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으나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재성은 방에 들어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눈이 말똥말똥했다.
경찰차 안에서 나이가 꽤 많아 보이는 경찰관과 나란히 앉아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 * *

“충격이 크겠구나.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게 조치해주마.”

“괜찮습니다.”

“병원은 가봐야 된다.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그 늦은 시간에 그 친굴 왜 찾아간 거지? 원래 친했나?”

“수련회 때 만나서 친해졌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갔었습니다. 어른들에겐 대단하지 않은 것일지는 몰라도요.”

“어떤 이야기지?”

“그건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을까? 그렇다면, 솔직하게 말해줘야 해.”

“아닙니다. 저도 그 친구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흠, 그래? 알았다. 시간이 늦었구나. 오늘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고, 수사 도중 ‘참고인’이 되어서 조사를 받을 수 있으니, 협조해줄 수 있겠지? 참고인이라고 크게 뭐가 있는 것은 아니고, 말 그대로 참고만 해주는 거야. 그러니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그렇게 할게요. 대신...”

“그래, 말해봐라.”
“집에 연락만 하지 말아주세요. 심려 끼쳐드리기 싫습니다.”

“네가 아직 성년이 아니기 때문에... 어쨌든 그리하마.”

“부탁합니다.”

“알았다.”

* * *

재성은 거친 숨을 쉬었다. 죄인이 아닌데도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좀 전의 그 늙은 경찰이 따라와서 “네가 공범이잖아? 그렇지 않아?”라며 차가운 수갑을 채울 거만 같았다.
재성은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그러다가 몇 초 후, 다시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유리라는 여자...
그녀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그녀는 시공간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는 거다.
그녀에게 부탁을 하면, 상현이가 자살을 하기 전 시점으로 돌아가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아니, 그렇게 해서 다시 살려놓는다고 하면?

- 좋은 대학은 물론이고, 원하는 것을 모두 다 이룰 수 있어요.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도 할 수 있고요.

재성의 검은 마음이 들썩 거렸다.

- 기회예요.

재성의 가슴이 쿵쾅댔다. 금세 다른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재성의 이성을 흐트러지게 했다.

그 여자의 말이 확실하다고 가정하고, 다시 역사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다고 가정하면...
그 여자의 주장대로 난 어차피 성공은 꿈도 꾸지 못하는 ‘하.류.인.생’의 운명으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래,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냥 이렇게 쭉 가보는 거다.
상현을 다시 살려야 한다면, 일단은 일정기간 살아보고 난 다음에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그의 투신을 막아도 된다. 그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230년 후에서 왔다면서 그것도 못할까?
아니지, 상현이가 원하는 길이 죽음이라면, 내가 그를 막을 이유가 없다. 남의 선택을 막는 것이 오히려 죄악일 것이다.

‘그래, 난 유리라는 사람의 말대로 ‘그 연구’를 위해 ‘약간의 시간만 투자’하면 그만이잖아. 이 사건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난 단지 그걸 미리 알았을 뿐이야. 그게 죄가 될 수는 없지.’

재성의 눈앞에 상현의 마지막 눈동자와 유리의 눈동자가 환상처럼 겹쳤다. 그 눈동자들이 이리저리 떠돌며 재성의 머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벌써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재성은 자신의 뺨을 툭툭 때렸다. 통증이 그대로 올라왔다.

소매 끝에 딱딱하게 굳어있는 피딱지가 보였다.
그가 남긴 피...

‘젠장!’

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재성은 재빨리 그 옷을 벗어던지고 침대를 쳐다봤다. 침대보에도 피가 묻어있었다. 그 얼룩이 불룩 솟아오르면서 머리가 터지고 사지가 꺾인 처참한 모습의 상현으로 변할 거만 같았다.
재성은 미친 사람처럼 그것을 걷어내 집어던지고는 헉헉거렸다.
그러다 우연히 벽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극심한 운동을 한 사람처럼 얼굴이 발그레했다. 금방이라도 그의 뒤쪽에서 검붉은 피와 뇌수를 뚝뚝 흘리는 녀석의 괴기스런 모습이 나타날 거만 같았다. 그리고 원망스런 표정으로 목을 죌 것만 같았다.

[ “이, 저주받을 놈아, 그 여자랑 짜고 나를 죽였지? 네가! 네가!!” ]

재성은 참을 수가 없어서 손바닥으로 벽을 쿵쿵 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절로 흘렀다. 머리를 이리저리 마구 흔들어도 피가래가 가득한 상현의 걸쭉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요동을 쳤다. 그리고 그건 이내 어떤 진동소리로 바뀌었다. 고갤 돌려보니, 책상 위에 핸드폰이 번쩍이고 있었다.
화면에 ‘정의찬 쌤’이란 발신인 표시가 올라왔다. 재성은 수련회 숙소 강당 화이트보드에 판서되어있던 정의찬의 번호를 받아 적기만 했을 뿐, 그에게 본인의 번호를 알려준 적은 없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핸드폰을 바라보는 재성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싸늘하게 타고 내려왔다. 전화기 벨소리는 마치 정의찬이 재성을 노려보면서 ‘난 다 알고 있다!’라고 외치는 듯 했다.
재성은 머뭇거리다가 겨우 전화를 받았다.

[ “새벽부터 미안하구나. 자고 있었니?” ]

“안녕하세요? 아까 깼어요.”

[ “상현이 소식은 알고 있지?” ]

정의찬의 목소리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재성은 그에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눈앞이 컴컴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정의찬이 계속 이야기했다.

[ “재성이가 바로 앞에서 목격을 했다며? 많이 놀랐겠네. 몸은 좀 어떠니?” ]

이어지는 건, 생각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 속에 ‘의심’이란 것은 당최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재성은 어떻게든 아주 그럴 듯한 변명을 해야 했다. 정의찬은 재성과 상현이가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란 것을 뻔히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련회 때 아쿠아신발 때문에 조금 친해졌어요. 어젠 뭘 물어보려고 갔었는데...”

재성은 경찰에게 이야기했던 것과 비슷하게 거짓으로 얼버무렸다.

[ “아쿠아신발? 흠, 그렇구나. 혹시 네가 알만한 건 없고?” ]

“그게...”

재성은 잠시 머뭇거렸다. 당장에라도 ‘미래에서 왔다는 그 이상한 여자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마음속의 외침이었다. 황당무계한 그 이야기를 믿어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더욱이 그 이야기로 인해 어떤 불이익이 생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녀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 만약 어기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하시면, 재성님과 저와의 관계는 모두 정리가 될 겁니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예요.
재성은 갑자기 갈증이 났다. 아주 시원한 것, 몸 속 깊숙한 곳까지 적셔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청량한 그 무언가를 당장 들이키고 싶었다. 그걸 억지로 참아내고 겨우 대답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그것뿐입니다.”

“그래, 알았다. 재성이가 오늘은 좀 쉬는 게 좋겠구나.”

전화를 끊은 재성은 잠시 동안 마음을 추스르고 마실 것을 가지러 가기 위해 방문 고리를 잡았다. 막 문을 여는 찰나에 바로 문 앞에서 여동생 소현과 마주쳤다. 두 사람 다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소현이 주방 쪽을 의식하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웬일이야? 깨우지 않아도 먼저 일어나고?”

“몇 시야?”

“늘 비슷한 시간이잖아.”

소현이 대답을 하면서 재성의 방 안을 힐끔거렸다. 소현은 한쪽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이불보와 옷가지를 보더니, ‘에고’라는 말과 함께 인상을 찌푸리며 재성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니, 이게 뭐야? 퀴퀴한 냄새도 나고...”

이불보와 옷을 걷어서 가지고 나가던 소현은 옷소매에 묻은 피를 보고는 깜짝 놀라 재성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까지 꾀죄죄한 것이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쉿, 그냥, 일이 좀 있었어.”

잠시 생각을 하던 소현은 밖의 눈치를 보더니 얼른 말했다.

“내가 애벌빨래를 하고 몰래 세탁기 안에 넣을 테니, 앞으론 사고 좀 치지 마.”

“그게 아니고...”

“됐어. 남자들 가끔 그런 거 알아. 빨리 가서 샤워부터 해.”

소현의 말에 재성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거실로 나왔다. 주방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재성은 버릇처럼 밥을 먹지 않겠다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다. 여느 때와는 달리 어머니는 아무런 말씀도 없었다. 소현이가 이불을 들고 뒤따라 나오며 말했다.

“엄마, 오빠 이불이 너무 더러워서... 세탁기에 넣기 전에 손으로 잠깐 문지르고 반찬통 꺼낼게요.”

그러자 어머니가 무뚝뚝한 어투로 대답했다.

“세탁기 선반 위에 있는 초록색 통 세제 써. 가장 왼쪽.”

아침부터 무슨 이불 빨래라며 보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넘어가자 동생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혀를 삐죽 내밀고는 베란다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러자 어머니가 대답했다.

“핏자국은 그걸로 해야 잘 지워져.”

순간 재성과 소현은 동작을 멈추고 서로의 눈을 마주봤다. 어머니가 뒤로 돌았다.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는지, 눈이 뻘겋게 충혈 되어있었다.

“경찰에서 연락 왔었다.”

“네?”

“이따가 엄마랑 병원에 가자. 바로 앞에서 그런 걸 봤으니...”

소현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재성과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머니는 소현에게 하던 걸마저 하라며 손짓을 했다.

“초록색 세제. 반 컵이면 돼. 뚜껑 잘 닫고...”

기사 이미지

어머니가 소현에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재성은 욕실에 들어가 문부터 잠갔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에 대한 실망이 클 텐데, 괜한 걱정거리까지 하나 더 늘려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재성은 대충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베란다 앞의 빨래통속에 들어있던 구겨진 옷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아무렇게나 껴입고는 가방을 맸다. 방 밖으로 막 나가려는 도중, 그의 눈에 드론이 들어왔다.

‘그래, 그 현장, 공중(空中)에서 찍어보자.’

재성은 가방을 열고 책을 모조리 쏟아버리고는 그 안에 드론을 넣고 다시 맸다. 그리고 잰걸음으로 현관 쪽으로 향했다. 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는 거야? 밥 먹고 엄마랑 병원가자니까...”

재성은 대답 없이 현관을 열자마자, 엘리베이터가 서있는 층을 확인하고는 그냥 계단실로 향했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동안, 뒤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리고 보니 핸드폰을 깜빡했다. 하지만, 재성은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당장에 그 ‘나이 많은 경찰’이든 ‘유리’든 만나 큰소리로 따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왜 모두를 이렇게 힘들게 만드느냐고...

재성은 성큼성큼 뛰어내려 1층 출입구 바로 앞에 다다랐다. 문밖으로 환한 빛이 비추자 재성은 그쪽을 쳐다보며 달음질을 했다.
그런데...
마치 물속으로 점프를 한 것처럼, 다리가 출렁거리는 것이었다. 갑자기 숨까지 막혔다. 이윽고 고막이 찢어질 듯, 각종 굉음과 함께 수천 개의 빛다발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재성은 공포에 떨며 온몸을 허우적거렸다. 잠시 후, 발 아래로 엄청난 압박이 가해지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세상이 조용해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체력이 급격히 소진되었는지 몸 전체가 저리고 무거웠다. 그리고 숨이 찼다. 어디선가 들리는 메아리.

‘헉, 헉, 헉, 헉....’

그건 재성 자신의 숨소리였다. 아무리 숨을 들이켜도 답답하기만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한동안 그 자세로 있던 재성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보였다.
한데, 이걸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너무 높았다. 우주를 꿰뚫어 보고 있다고 해야 할까? 막힘이 없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그런 하늘이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번엔 엄청나게 큰 거리가 보였다. 그 옆으로 쭉 나열되어 있는 회색의 건물들.

‘아...’

바로 그곳이었다.

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거리를 천천히 걸어갔다. 모든 것이 그때와 같았다.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회색 건물 사이로 중세의 성(城)처럼 생긴 서양식 건축물이 보였다. 그것이 고딕양식인지, 로마네스크양식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유럽풍의 옛 건물이었다. 하루 전에 보았던 중국식 저택의 그것처럼, 서양식 건축물 옆의 회색 건물들도 그 서양식건물을 호위하는 건물들로 보였다. 신기한 것은 ‘이 거리 속 서양식 건축물의 광경’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재성의 다리가 그곳을 향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성은 머뭇거리지 않고 발목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본인의 의지로 더 빨리 그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니 저번의 그것처럼 출입구가 족히 10미터는 넘어 보였다. 그 생긴 형태가 다를 뿐이었다. 재성은 주저 없이 두 손으로 그 문을 힘껏 밀었다. 그러자 어떤 마찰이나 소리도 없이 문이 스르르 열렸다.

역시나 그 안은 엄청났다.
끝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널찍한 정원에는 각종 나무와 풀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식 저택 안에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식물들이었다. 이 역시 재성이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 안에 두 발을 들여놓자,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저번처럼, 그 안쪽으로는 손잡이나 열림 장치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재성은 뒤로 돌아 그때처럼 낯설기만 한 그곳을 마치 잘 아는 곳에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걸어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 건물이 나타났다.
그 현관 바로 앞에 그녀, ‘유리’가 서있었다.
재성은 그녀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녀는 하루 전에 입었던 옷보다는 노출이 적었지만, 재성의 심장을 충분히 자극하고도 남을 야릇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또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하루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머리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현실에서는 누구도 상상 못할 특이한 차림새일 거라 생각됐다. 그 모습에 재성은 그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재성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유리가 반가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길쭉한 손가락에 검은색의 도구가 들려있었으나, 재성은 그걸 알지 못했다.

“다시 오실 줄 알았어요.”

재성이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에게 따지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갑자기 떠올려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재성의 머릿속에 맴돌던 상현의 죽음이 완전 남의 일 같이 담담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 그녀 외에 다른 기억을 떠올릴 수가 없다는 표현이 더 나을 것이다. -

유리의 매혹적인 초록색 눈동자가 재성의 마음을 뒤흔드는 동안,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은색 도구에서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휙 튀어나가 재성의 팔뚝에 꽂혔다가 떨어졌다. 아무런 느낌이 없는지, 재성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리의 입가가 올라갔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그분의 운명입니다.”

재성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제 전 어떻게 하면 됩니까?”

유리는 손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연구를 도와주셔야죠. 이쪽으로 오세요.”

유리는 복도 안을 가리켰다. 재성은 너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기사 이미지


작가 소개 
동국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공포 미스터리 창작 전문 작가 그룹 언더 프리(Under Free) 부대표 역임

그 외의 작품 >
귀족들의 사이트
환상 파일 시리즈
A3
더 호러
사라진 손가락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