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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비누 밟고 미끄러져 기억 잃은 킬러, 그 장면의 힘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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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 이계벽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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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어떤 일이 펼쳐질까. 냉철한 킬러 형욱(유해진)은 의뢰받은 일을 마친 후 공중목욕탕에 들렀다가 미끄러져 기억을 잃고 만다. 몰래 목욕탕 사물함 열쇠를 바꿔치기한 무명 배우 재성(이준)이 형욱 행세를 하며 돈을 펑펑 쓰는 동안, 자신을 재성이라 착각한 형욱은 배우로 성공하려 필사의 노력을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구해 준 119 구급대원 리나(조윤희)와의 감정도 조금씩 커져만 간다.

배우 유해진(46)이 원톱 주연을 맡은 ‘럭키’(10월 13일 개봉)는 쉴 틈 없이 웃기다 감동까지 얹어 주는 코미디영화다. 중반부 전개가 느슨하고 결말의 ‘한탕’에도 허점이 있지만 눈감아 줄 만하다. 일본 영화 ‘열쇠 도둑의 방법’(2012, 우치다 켄지 감독)을 리메이크했지만, 로맨스를 중심으로 차분한 톤이었던 원작에 비해 더 유쾌하고 발랄하다. 이계벽(45) 감독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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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가을, 로맨틱 코미디 ‘야수와 미녀’를 내놓은 후 꼭 11년 만의 연출작이다. 감회가 남다르겠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네. 연출작은 정말 오랜만이지만, 시나리오 작업은 꾸준히 했다. 강의(KAC 한국예술원 연기예술학부)도 하고 있기에 ‘영화계를 떠났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동안 나보다 가족이 더 답답해 했던 것 같다(웃음).”
오랜만에 연출을 맡은 계기라면.
“우치다 켄지 감독의 ‘내 마음의 이방인’(2004)을 무척 좋아한다. 리메이크작 연출을 준비하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국 각본만 쓰게 됐다. 그 영화가 ‘커플즈’(2011, 정용기 감독)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우치다 감독의 또 다른 작품이 ‘히로스에 료코 등을 캐스팅해 일본에서 호평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열쇠 도둑의 방법’이었다. ‘커플즈’ 각본을 쓴 인연이 있으니, ‘이번엔 연출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작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로맨틱 코미디에 범죄영화 요소를 넣는 게 우치다 감독의 특징인데, 이 점을 한국 관객이 신선하게 느낄 것 같았다.”
하지만 ‘럭키’는 원작과 달리 코미디·드라마 요소가 더 강한데.
“로맨틱 코미디는 연출 경험이 있으니까, 이번에는 다른 스타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컸다. 남성적 느낌이랄까. 그래서 사랑 이야기는 줄이고, 킬러 형욱이 새 삶을 찾아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원작에 대한 호평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한국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내 마음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다(웃음). 오히려 그런 생각이 시나리오를 쓸 때 방해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원작을 처음 보았던 순간의 기분 좋은 느낌에만 집중하려 했다. 한 장면을 꼽자면, 킬러가 공중목욕탕에서 비누를 밟고 넘어지는 신이 너무 웃겼다. 그 장면의 인상이 무척 강했기 때문에, ‘럭키’를 끝까지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전체적인 극의 전개는 원작과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 캐스팅이 적확했던 것 같다. 배우 유해진이 그렇게 귀여워 보일 줄이야!
“시나리오를 한창 수정하던 어느 날, 제작사 대표님(임승용)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킬러 역의 배우로) 유해진씨 어떨까?’라고 하셨다.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랄까. ‘너무 좋아요!’라고 단번에 답했다. 사실 처음에는 무조건 잘생긴 배우를 캐스팅하려 했다. 그런데 유해진을 형욱이라 생각하니 감정 이입이 쉽게 되더라. ‘조각 미남’이었다면 관객이 그 캐릭터에 몰입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아, 물론 그가 잘생기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웃음).”
유해진의 매력으로 웃기는 장면들이 꽤 많다. 그것이 극 중 ‘형욱의 매력’으로 보여야 하는데, ‘유해진의 매력’으로만 보일 수도 있어서 고민이 컸을 법한데.
“물론 그런 고민이 있었다. 그러나 촬영을 시작하면서 그 부분에 대한 걱정은 완전히 사라졌다. 유해진은 굉장히 꼼꼼한 스타일이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배우다. 그의 과장되지 않은 연기 톤이 좋았기에 그대로 밀어붙였다. 사람들은 유해진을 ‘애드리브 많이 하는 배우’라 오해하는데, 절대 아니다.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는 편이고 대본에도 충실하다. 무척 듬직한 배우이기에, 형욱이 아닌 유해진의 개인기로 웃길까 봐 걱정하지는 않았다.”
‘럭키’에서 형욱과 리나의 로맨스도 빼놓을 수 없다. 유해진과 조윤희의 호흡도 ‘의외로’ 좋더라.
“조윤희에게서 리나의 선하고 건강한 기운이 느껴져 캐스팅했다. 그는 실제로도 무척 착하고 발랄한 사람이다. 재성 역을 맡은 이준도 무척 열심히 연기해 줬다. 첫 미팅에서 ‘아이돌(엠블랙) 활동을 그만두면서까지 연기가 하고 싶었다’고 담담히 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무명 배우 재성의 마음을 잘 이해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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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만큼 감동이 있는 드라마다. 모든 것을 잃고 다른 삶을 사는 동안, 형욱은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된다. 재성도 마찬가지다. 그는 형욱을 통해 제 삶의 가치를 알아 간다
“형욱이 새롭게 꾸린 삶은, 재성이 내버리고 포기하려 했던 인생이다. 그런 삶을 형욱이 대신 살아 내면서 ‘나는 오히려 그 덕에 좋았는걸!’이라 말하는 이야기다. 유해진은 ‘하찮은 인생은 없다’는 한마디로 이 영화를 정리하던데(웃음). ‘인생의 골목골목에서 느낀 경험은 모두 소중하며, 그러한 경험이 어쩌면 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유쾌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실제로 그런 경험은 없나.
 “에이, 난 무난하게 사는 평범한 세 아이의 아빠다. 그래서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에 더 매력을 느낀다(웃음).”
형욱의 이야기와 맞물린 재성의 에피소드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정된 시간에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나. 그렇기에 재성과 은주(임지연)의 로맨스는 압축했다. 그럼에도 재성은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만드는 중요한 인물이다. 주요 사건이 벌어지고 진행되는 것은 모두 재성 덕분이니까. 물론 그의 로맨스를 더 보고 싶은 관객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 같다.”
‘웃음과 눈물을 섞어야 한다’는 한국 코미디영화의 강박에서 벗어나 있다. 그 부분이 ‘럭키’의 큰 장점이다.
“일부러 관객의 눈물을 쥐어짜는 장면을 넣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너무 작위적일 것 같았다. 뭐든 너무 과하지 않은 게 좋다. 그리고 내 원래 성향이 유쾌하다.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너는 왜 공포를 써도 웃기고, 스릴러를 써도 웃기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때문에 유해진에게 혼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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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게 뭐 어때서.
“너무 심하게 긍정적이라고(웃음). 촬영 현장에는 가끔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이 생긴다. 그럴 때도 나는 느긋한 편이다. ‘이 상황에서 어쩌면 그렇게 편안하니’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박찬욱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지만, 실제 내놓은 영화는 대부분 코미디다. 연출 데뷔작 ‘야수와 미녀’부터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한 ‘커플즈’ ‘남쪽으로 튀어’(2013, 임순례 감독)에 이어 ‘럭키’까지. 모두 그런 성향 덕분 아닐까.
“아마 그렇겠지. 코미디 장르를 작업할 때 무척 재미있다. ‘주인공이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점에서 코미디와 스릴러는 비슷하기도 하다. 그런데 ‘상황’보다 ‘인간’에 집중하는 점이 다른 것 같다. 배우의 개인기로 승부하는 웃음보다, 상황이 잘 짜인 코미디를 더 좋아한다. 그런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
다음 작품은.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다만 내가 나이를 먹는 만큼, 나의 영화도 조금 더 성숙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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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사진=정경애(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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