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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화 덱스터스튜디오 대표, 영화 감독과 CEO 겸업 성공한 능력자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성공한 영화감독이자 560억원대 상장주식을 보유한 경영자인 김용화 감독. 하지만 20대 시절엔 5년 넘게 고등어를 팔고 막노동을 했던 흑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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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차태현 주연의 영화 <신과 함께>의 연출을 맡은 김용화 감독을 서울 상암동 덱스터스튜디오 본사에서 만났다. 전민규 기자

영화 <오!브라더스>(2003), <미녀는 괴로워>(2006), <국가대표>(2009). 각각 관객 수 314·662·848만 명을 기록한 이 영화들은 김용화(45) 덱스터스튜디오 대표의 필모그래피다. 데뷔작부터 흥행 3연타를 치며 대종상·청룡영화상 감독상 등을 수상한 김 감독은 2013년에 개봉한 3D 영화 <미스터 고>가 한국 관객 동원 132만 명에 그쳐 주춤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 이 ‘실패’에는 더 큰 성공이 숨어있었다.

<미스터 고>는 야구하는 고릴라 링링과 15세 소녀 웨이웨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순제작비 225억원의 절반이 넘는 120억원이 시각적 특수효과(VFX)에 쓰였다. 거액의 돈과 오랜 시간을 들여 독자적인 기술로 고릴라의 털을 구현하던 김 감독은 2011년 아예 VFX 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가 지금의 시가총액 2089억원(9월 13일 기준), 직원 수 370여 명, 매출 261억원(2015년 기준)의 덱스터스튜디오다. 한국에서 기대만큼 관객을 끌지 못한 <미스터 고>는 중국의 대형 투자배급사 화이브라더스로부터 500만 달러를 투자받아 중국에서 210억원의 흥행수익을 올렸다. <미스터 고>로 중국에 진출한 덱스터스튜디오는 중국 영화 <적인걸2>, <몽키킹> 등의 VFX를 맡으며 대륙에서 인지도를 높였다.

특수효과 회사 차려 중국대륙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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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고>의 주인공 고릴라 링링. 김용화 감독의 VFX 스튜디오 덱스터 디지털이 만들었다. [사진 제공 = 쇼박스]

상하이에 직원 40여 명 규모의 중국 법인도 설립했다. 지난해 중국 최대 문화미디어그룹으로 꼽히는 완다그룹과 레노버의 모회사인 레전드 캐피털로부터 각각 1000만 달러(약 110억원)를 투자받은 데 이어 지난 7월에는 중국 최대 애니메이션 회사인 알파그룹의 자회사인 알파픽처스와 글로벌 콘텐트 제작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덱스터스튜디오의 2대 주주인 프로메테우스 캐피털의 모기업 완다그룹이 올 초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 제작사 레전더리픽처스를 인수하면서 미국 진출도 한발 가까워졌다.

지난 5월에는 3년 만에 다시 메가폰도 잡았다. 하정우·차태현 주연의 영화 <신과 함께>의 연출을 맡아서다.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편당 제작비 150억원이 들어간 판타지 블록버스터로 내년 여름(1부)과 2018년 여름(2부)에 개봉할 예정이다. 8월 19일 부산 촬영 전 잠시 짬을 낸 김 대표를 서울 상암동 덱스터스튜디오 본사에서 만났다.

촬영하느라, 회사 경영하느라 바쁘겠다.
어제까지 경기도 안산에서 촬영했고 모레 부산에 간다. 내년 1월까지 촬영할 예정이다. 보통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12시간씩 4개월 정도 찍는데 1·2부를 함께 촬영하고 있어 정신이 없긴 하다. 촬영이 끝나고 자기 전에 회사 보고서를 본다.
원래 그런 식으로 찍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볼 수 있는 방식으로 한국에서는 처음이다.
예술을 하는 영화감독과 숫자를 보는 경영은 완전히 다른 영역 아닌가.
같은 일이다. 둘 다 감독하는 거잖나.
전문경영인을 세울 계획은 없나.
회사 이사회가 매주 회의를 해 좋은 결정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촬영이 없을 때는 출근하지만 촬영이 있는 날은 전화·서면으로 보고를 받는다. 직원이 보고서를 들고 촬영장에 오기도 한다. 감독들이 제작사를 경영하기도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상장사 대표로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원래 회사를 세울 생각이 있었나.
전혀. 영화가 성공하면서 소명의식, 책임감 같은 것이 생겼다. 꿈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관객들을 많이 웃게 하면서 감독상을 받는 거다. <오!브라더스>가 성공하면서 어린 나이에 목표를 이뤘다. <미녀는 괴로워>, <국가대표>가 연이어 성공하고 나니 결국 이걸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노력했구나 싶어 허무하기도 했다. 나는 먹고 살기 걱정 없겠고, 이제는 공동체의 가치실현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그게 회사 설립으로 이어졌다. 다시 출발선에 선 거였다.

공동체의 가치실현 위해 회사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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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영화 개봉할 때 기분이 어땠나.
터졌구나 싶었다. 100만 명만 들어도 좋겠다고 했는데 손익분기점(120만 명)을 넘어 300만 명이 들었다. 정말 행복했다. 신인배우가 출연한 <미녀는 괴로워>까지 성공하니 나는 그냥 다 잘 되나 보다 싶었다. 한때 내가 영화를 잘 만드나보다 교만에 빠진 적이 있었다. 지금은 착각이란 걸 안다. 그러면서 발전하는 거다.
어쨌든 성공한 데는 비결이 있지 않겠나.
운이다. 내가 실력이 있어서 성공했다고 믿는 것보다 오만한 게 없다. 3연타를 치다가 <미스터 고>에서 주춤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직장인이든, 영화감독이든 프로라면 노력하고 잘하는 건 기본이다. 근데 운에만 기댈 수도 없다. 그러니 비결은 그냥 계속 노력하는 거다.
<미스터 고>는 생각보다 흥행하지 못했다.
잘 안됐지만 그 영화가 회사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됐다.
100% 자체 기술로 3D 영화를 만들었다. 흥행보다는 도전에 무게를 둔 건가.
아니다. 100편 만들면 100편 흥행을 위해 만든다. 지지율 꼴찌인 국회의원도 당선을 바라고 나오지 않나. 실험 정신이 강하긴 했다. ‘활동적 타성’이라는 말이 있다. 한 번 성공한 이후 이전에 하던 대로 더 열심히 하는 것을 말한다. 그게 제일 무서웠다. 매 작품마다 나를 벼랑 끝에 몰아넣고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려고 했다.
당시 한국의 VFX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였나.
개개인의 능력은 미국에 뒤지지 않았다. 다만 본격적으로 이 분야에 투자하고 뛰어드는 사람이 없었다. 다른 VFX 회사도 있었지만 기존 방식대로 한국 영화에 납품하는 수준이었다. 덱스터스튜디오는 아티스트의 영역을 넘어 공학적으로 접근했다. 매년 매출의 5~7%를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하이테크가 결국 예술이 되는 거다. 대표가 영화감독이라고 하니 시장에서도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KTB인베스트먼트·LB인베스트먼트 등에서 투자가 들어와 제대로 한 번 해보자고 결심했다. VFX는 90점부터가 중요하다. 그때부터 1점에서 승부가 갈리는 거다. 해외에 맡기려니 1000억원 넘게 들겠더라. 자체 기술 개발을 할 수밖에 없었다. 160명이 1년 반 넘게 고릴라 털을 실제처럼 보이게 하는 데 매달렸다. 그러면서 기술 수준이 올라갔다.
어떻게 1000억원이 드는 걸 120억원으로 했나.
기존의 상용 툴을 쓰면 버그(오류)가 많이 생겨 오히려 돈과 시간이 더 든다. 고릴라가 나오는 컷이 1000컷인데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자체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30년 넘게 이 분야에서 일한 정성진 본부장, 강종익 본부장과 공학도들이 나서준 덕에 가능했다. 그래도 한 컷 찍는데 1000만원이 들고 한 컷 수정하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 영화를 만든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거였다.
실력자들이 뭘 보고 덱스터로 모인 건가.
그런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가치 있다고 믿는 일을 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
기대만큼 흥행이 되지 않았을 때 실망했겠다.
멀리서 보면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럼 성공은 뭐냐? 상장한 것? 아니다. 그만두면 실패한 거지만 난 그만둔 적 없다. 오히려 잘 되면 불안해해야 한다. 안 될 때는 더 나빠질 일이 별로 없으니까. 실패를 가슴 아파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일 때문에 좌절한 경험을 굳이 찾는다면 첫 번째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데뷔하려다가 엎어졌을 때 큰 무력감을 느꼈다. <미스터 고> 때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 잘 견뎌낸 것 같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유전자다.
말이 쉽다.
닥치면 다 한다.(웃음)
그렇게 회사를 세우고 5년 동안 달려왔다. 얼마나 성장했나.
직원 30명으로 시작해 지금 170명이 넘는다. VFX 사업부가 비중이 제일 크고 영화를 제작하는 콘텐트 사업부, 촬영을 특화한 워크숍 사업부, 디지털 색보정(D·I) 사업부로 구성된다. 한 편의 영화가 시장에 나올 때까지 전 과정을 묶으려는 거다. 회사의 체력을 봐서 음향 사업부도 신설할 계획이다.
영화산업도 급변하지 않겠나. 대비하고 있나.
5년 안에 엄청난 시각적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본다. 극장이 가상현실(VR) 체험관처럼 바뀔 수도 있다. 어떤 순간에는 가상 배우가 등장할 거다. 이미 기술적으로는 중심에 들어와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과 스토리다. 관객이 2시간 동안 극장에서 주인공의 마음을 대리체험한다는 본질은 바뀌지 않을 거다. 그에 맞게 사업 영역을 조정할 계획이다.
경쟁사는 어디라고 생각하나.
아시아에서는 없는 것 같다. 규모보다 기술력과 인지도가 중요하다. <아바타>를 만든 ILM, <반지의 제왕>을 제작한 웨타디지털 같은 할리우드 업체와 비교해 기술력으로는 뒤지지 않는다고 본다. 매출 규모가 아닌 실력 있는 회사로 알려지고 싶다.
지난해 상장도 했다.
실력으로 1등을 하려면 순차적으로 자연스럽게 갈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도약이 필요하지 않을까. 자금을 유치하면서 대회 신임도를 높이기 위해 기업공개(IPO)를 택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 존경받고 싶다

상장하면서 ‘주식 부자’가 됐다.
그런 얘기가 나오면 당황한다. 그냥 영화감독이다. 지분을 권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바닥이다. 책임이다. 주식을 현금화하려고 만든 회사가 아니다. 그럴 거면 영화로 번 돈으로 그냥 편하게 살았지. 근데 액수가 크긴 하더라. 그래도 아직 배고프다.
인터뷰 내내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큰 굴곡 없이 살아온 영화학도처럼 보인다.
가난한 집에서 컸다. 유일하게 엄청난게 좌절한 경험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다. 중앙대 영화학과를 나왔는데 대학교 1·2학년 때 아버지·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때 철이 든 것 같다. 길에 자빠져도(넘어져도) 아무도 일으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실패에 의연해진 것도 그때부터다. 5년 넘게 생선장사를 하고 막노동도 하면서 등록금을 벌었다. 그러면서 별별 사기꾼도 많이 만났다. 사회경험을 일찍 한 거다.
원래 꿈이 영화감독이었나.
스티븐 스필버그, 토니 스콧, 마이클 만, 피터 잭슨, 제임스 카메론 같은 감독을 좋아한다. 어떤 영화는 100번을 보기도 했다. 컷을 다 분석하면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나 강제규 감독의 <쉬리>를 보면서 영화감독을 꿈꿨다. 근데 요즘 생각해보면 영화감독이 꿈이 아니라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쉽지 않다. 가령 비서는 나를 제일 잘 알지 않나. 이 사람에게 존경받으며 회사를 이끌고 싶은 거다. 내 마인드가 그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길 바란다.

영화감독과 경영자를 계속 병행할 생각인가.
흠. 되게 어려운 문제다. 사실 경영자보다 영화감독으로 받는 제안이 더 많긴 하다. <신과 함께>를 마무리 짓고 정말 깊이 생각해보려고 한다. 감독이든, 경영자든 책임지는 자리 아닌가.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게 맞다. 어쩌면 그게 감독 일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에서는 영화가 더 어렵다.

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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