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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의 좌충우돌 행보] 중국·러시아에 다가가고 미국과 거리 두고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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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펼치며 91%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지난 6월30일 필리핀의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한 로드리고 두테르테(71)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취임 후 벌인 정치적·외교적 행보가 기존의 필리핀 지도자들이 보여줬던 것과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과 거리를 두고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오바마의 두테르테 비난에 반발…중국 경계하려는 미국, 필리핀 도움 절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미국·필리핀의 연합훈련이 시작된 10월 4일 “이 훈련이 미국과의 마지막 합동훈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두테르테는 “나는 미국과 헤어지고 러시아와 중국을 향해 나아갈 것”아라며 “오바마는 지옥에 갈 수 있을 것”라고 막말을 내뱉었다. 지난 9월 초 오바마에게 욕설을 퍼부은 지 한 달 만이다. 당시 두테르테는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정상회의를 앞두고 “(오바마가 필리핀의 마약 용의자 사살 정책에 관해 묻는다면) 개XX라고 욕할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오바마가 그 직전 미국의 기자회견장에서 두테르테에 올바른 방법으로 마약범을 단속하라고 촉구한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세아 정상회의 기간에 예정된 미국과 필리핀의 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취소되는 파행을 부르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은 오바바 대통령뿐 아니라 마약 용의자 사살 정책에 비판적인 유럽연합(EU)에도 막말을 하는 등 좌충우돌했다. 취임 후 두테르테 대통령은 경찰과 자경단을 동원해 3500여 명의 마약 용의자를 붙잡아 처형했다. 이로 인해 유엔(UN)·미국·EU와 국제 인권단체의 비판을 받아왔다.

두테르테 “오바마는 지옥에 갈 수 있을 것” 막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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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열린 중국·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만난 리커창 중국 총리(왼쪽)와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오른쪽). 가운데는 통룬 시술리트 라오스 총리. [사진 중앙포토]

이에 대해 미국 백악관의 조시 어니스트 대변인은 “미국과 필리핀의 우호적 관계에 걸맞지 않은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어니스트 대변인은 “미국은 필리핀 정부의 무차별 살상에 대한 비판을 계속할 것”이라며 앞으로도 마약과의 전쟁에서 초법적인 용의자 사실에 대한 비판을 계속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필리핀에 무기 판매를 거절하자, 두테르테는 중국이나 러시아에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이렇게 불평을 쏟아내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앞서 9월30일에는 자신을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는 발언으로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는 “히틀러는 3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필리핀에도 300만 명의 마약 중독자가 있는데 이들을 학살하면 기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내 나라의 문제를 끝내고 파멸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겠다”고 강조했다. 두테르테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마약 사범들을 무자비하게 단속 처분했다. 경찰에 적발된 경우도 있지만 많은 용의자가 자경단 등 민간인에 의한 ‘즉결 처형’이었다.

이 같은 초법적 ‘처벌’에 대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우려를 표명했지만 두테르테의 입장은 바뀌지 않고 있다. 이날 두테르테는 대량 학살 혐의로 국제재판소에 제소될 수 있다는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은 필리핀에서 법을 위반한 적 없다고 주장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히틀러’ 발언은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을 불렀다. 독일 외교부는 바로 그날 주독 필리핀 대사를 초치해 두테르테의 발언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마르틴 셰퍼 독일 외교부 대변인은 “유대인 학살이라는 잔혹행위를 다른 것에 비유하는 어떤 행위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에마뉘엘 나숀 이스라엘 외교부 대변인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자신의 발언을 해명할 길을 찾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로널드 라우더 세계유대인회의 회장은 “비인도적이고 인명을 경시하는 것”이라며 두테르테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영국 BBC 방송은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은 (300만 명이 아닌) 600만 명에 이른다”며 “두테르테는 잘못된 수치를 인용했다”고 지적했다. 이 방송은 “필리핀의 마약 중독자도 전체 인구의 1.8% 수준인 180만 명으로 추산된다”라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에르네스토 아벨라 필리핀 대통령궁 대변인은 페이스북을 통해 “대통령의 표현은 자신이 대학살을 자행한 히틀러처럼 비치는 데 따른 완곡한 표현이었을 뿐”이라며 “희생된 유대인을 헐뜯을 의도는 없었다”라고 해명했다. 두테르테도 10월 2일 필리핀 바콜로드시에서 열린 페스티벌 개막식에서 “독일인에 의해 살해된 600만 명의 유대인에 대한 기억을 깎아 내릴 의도는 절대 없었다”며 “유대인 사회에 깊이 사과한다”고 말했다.

초법적 범죄와의 전쟁

하지만 그는 이런 사과를 하자마자 화살을 미국으로 돌렸다. 필리핀에서 미군 철수를 요구할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그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인용 발언을 사과한 바로 그 자리에서 미국과 필리핀 정부가 맺은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EDCA는 미군이 10년 간 필리핀 군사기지 이용을 허용하고 시설물도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으로 이뤄졌다.

이 협정은 미국이 남중국해에서 갈수록 영향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를 위해 전략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 ABSCBN 방송 등 필리핀 현지 언론 따르면 두테르테는 이날 “미군의 필리핀 주둔을 양허하고 있는 EDCA는 당시 대통령인 베니그노 아키노의 사인 대신 국방장관이었던 볼테이어 가즈민의 사인만 있다”며 “나는 미군이 필리핀을 떠날 것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테르테는 취임 이후 반미-친중 언행을 이어왔다. 두테르테는 10월19일 사흘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 만날 예정이다. 자국의 전략적 가치를 두고 미국을 자극하면서 중국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9월26일 기자회견에서 중국·러시아와 전면적인 관계 개선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중·러 양국과 경제·무역 등 모든 영역에서의 협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며 최장 120년의 토지 임대도 허락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선 “루비콘 강을 건넜다”고 말하며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확인했다. 당시 그는 곧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고 이어 일본과 러시아도 방문하겠다고 밝혔다.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다른 나라와의 관계 강화로 풀겠다는 것이다.

두테르테가 연일 미국에만 막말을 쏟아내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그에게 권력을 안겨준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된 ‘마약과의 전쟁’에 대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두테르테식 마약과의 전쟁은 한마디로 마약이라는 악을 제거하기 위해 초법적인 대응을 허용하고 부추기는 것이다. 체포와 재판에 거친 적법한 처벌이 아니라 현장 사살과 즉결 처분을 바탕으로 한 대응이다. 인권·법치를 기반으로 하는 미국의 눈엔 인권침해이자 법치의 파괴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일부에선 두테르테가 뿌리 깊은 반미사상을 갖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연유는 그가 디바오 시장을 맡고 있던 지난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에버그린 호텔’이라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두테르테가 당한 경험이 그를 반미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그해 5월 자신을 ‘보물 사냥꾼’이라고 하고 다녔던 마이클 터렌스 메이링이라는 미국인이서 다리 치료를 받던 메이링이 사흘 후 병원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필리핀 경찰은 미국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이 필리핀 당국의 허락이나 사전 조율 없이 한밤중에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엄연히 범죄 용의자로서 필리핀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던 인물인데 정식 신병 인도 절차도 없이 미국 당국이 그를 몰래 데려갔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없었다. 그렇게 추측만 했을 뿐이다.

두테르테의 뿌리 깊은 반미사상?

그러나 검사 출신으로 시장을 맡고 있던 두테르테는 이 사건을 보고 받고 FBI 개입설을 믿었다. 그는 “미국이 필리핀 땅에서 필리핀의 법을 온통 무시하고 범죄 용의자를 데리고 사라졌다”며 격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메이링이 필리핀에서 미국이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는 공작성 테러와 연관됐다는 의심을 굳혔다고 한다. 일부 언론에선 두테르테가 대학에 재학 중이던 시절 좌파운동과도 연계됐다는 보도도 하고 있다.

91%에 이르는 지지율은 그의 막말이나 대미정책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게다가 미국이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봉쇄하려면 필리핀을 전초기지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급한 것은 미국이지 두테르테가 아니라는 외교적 현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손을 잡으면 중국이 섭섭지 않게 대하리라는 기대도 담긴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런 두테르테 리스크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리핀 페소화는 최근 들어 7년 만의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정책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안이 커지면서 페소화가 급락하는 추세를 보이는 것이다. 페소화 가치는 달러화에 대해 최근 3개월간 2.7% 하락해 아시아 통화 중 가장 최악의 성적 기록하고 있다. 글로벌 펀드는 필리핀 주식을 연속 순매도하고 있다. 이는 두테르테의 ‘마약과의 전쟁’, 미국과 유엔 등에 대한 폭언이 부르고 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보도했다.

이런 국제적인 평가에도 필리핀 국내에서 두테르테의 평가는 좋은 편이다.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율이 말해준다. 올해 들어 필리핀의 개발· 건설업 재벌은 신바람이 났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취임 직후 ‘인프라 황금시대’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건설 및 개발산업이 한층 힘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필리핀이 두테르테의 범죄와의 전쟁으로 질서를 되찾고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가 넘친다.

페소화 가치 급락 속 두테르테 지지율은 고공행진

필리핀은 인구대국이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16년 10월7일 기준으로 1억312만 명에 이른다. 전 세계 인구의 1.38%를 차지한다. 중국(13억7917만), 인도(13억3096만), 미국(3억2465만), 인도네시아(2억6058만), 브라질(2억676만), 파키스탄(1억 94476만), 나이지리아(1억8798만), 방글라데시(1억6121만), 러시아(1억4669만), 멕시코(1억2863만), 일본(1억2668만)에 이어 세계 13위다. 필리핀의 인구는 이렇게 많지만 지극히 가난한 나라다. 명목금액 기준 국내총생산(GDP)은 국제통화기금(IMF)의 2016년 예상치로 3103억 달러에 이른다.

세계 33위다. 아랍에미리트(3251억 달러, 32위), 말레이시아(3061억 달러, 34위), 이스라엘(3061억 달러)과 비슷한 수준이다. 중국의 일부인 도시국가 홍콩(3224억 달러)과도 엇비슷하다. 필리핀의 1인당 GDP는 2015년 IMF 통계 기준으로 2858달러로 세계 123위다. 아시아에서는 히말라야 산맥의 은둔 국가인 부탄(2843달러), 동남아의 신생국가인 동티모르(2244달러),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체제전환 중인 베트남(2088달러), 파푸아뉴기니(2085달러)와 비슷하다. 나이지리아(2743달러), 수단(2175달러), 콩고(2032달러) 같은 ‘바나나 공화국’, 즉 부패한 독재국가와 별 차이가 없다. 아시아의 빈국으로 분류된다. 빈곤선 이하로 생활하는 국민이 전체의 26.3%나 된다.

2016년에는 1인당 GDP가 3042달러로 금액상으론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순위는 세계 126위로 조금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성장률은 7% 정도 될 것으로 예상된다. 주요 산업이 전자제품 조립, 식품 가공, 조선, 화학, 섬유, 금속, 어업, 쌀농사 등이다. 2015년 기준 588억 달러를 수출했으며 반도체, 전자제품(조립품), 수송도구, 섬유, 구리제품, 석유제품, 코코넛 기름, 과일 등이다.

주요 수출 국가는 일본(21.3%), 미국(14.7%), 중국(12.4%), 홍콩(8%), 싱가포르(7.3%), 한국(6%) 등이다. 수입은 710억 달러에 이르는데 전자제품, 연료, 기계와 수송도구, 철강, 섬유, 곡물 등이다. 주요 수입 국가는 중국(12.9%), 미국(11.2%), 일본(8.4%), 대만(7.8%), 한국(7.7%) 등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수출에서 일본이 1위, 미국이 2위, 중국이 3위이고, 수입에선 중국이 1위, 미국이 2위, 일본이 3위라는 점이다.

한국은 필리핀의 수출에서 6위, 수입에선 5위를 차지한다. 필리핀의 무역에서 한국-일본-미국 같은 친서방 국가가 차지하는 비율이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보다 높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서방이 아닌 중국과 손을 잡는 것이 경제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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