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가계부채 사이에 갇힌 이주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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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통위 ‘통화정책방향’ 단어 분석해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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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은 13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1.25%인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지난 6월 1.5%에서 1.25%로 내린 이후 4개월 연속 동결이다. 가계부채 증가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12월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세계 경제와 국내 경제의 완만한 성장세 유지 전망, 점차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소비자물가 상승률, 예년 수준을 상회하는 가계대출 증가세 등을 감안해 금통위원 만장일치로 금리 동결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성장세 회복을 지원하는 가운데’ 표현 쓴 기간
기준금리 내린 시점과 대체로 맞아떨어져
한은, 이번달에도 기준 금리 1.25%로 동결

한국은행이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결정할 때마다 발표하는 설명자료는 기준금리 결정의 배경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맨 마지막에 있는 ‘향후 정책 방향’은 앞으로 계획과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두 문장으로 구성된 4~5줄짜리 짧은 글이지만 단어의 등장 횟수와 위치, 내용 하나하나 의미가 있다고 시장은 해석한다. 첫 번째 문장에는 통화정책 방향을, 두 번째 문장은 정책을 운용하면서 고려하는 변수를 중요도 순으로 나열한다고 판단한다. 한국은행은 이달 통화정책 방향에서도 가장 중요한 고려 변수로 ‘성장세’와 ‘가계부채’를 꼽았다.

과거 이성태 전 총재는 ‘당분간’이란 단어의 사용 여부로, 김중수 전 총재는 ‘GDP 갭’이란 용어를 이용해 한국은행이 갈 길을 내비쳤다. 이주열 총재는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하고 있을까. 이 총재가 취임한 2014년 4월부터 이달까지 31개월 동안 향후 정책 방향을 키워드별로 분석했다.

현재 한국은행의 정책 방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키워드는 ‘성장세’다. 이 총재는 취임 이후 한번도 빠짐없이 이 단어를 사용했다. 2014년 7월부터 28개월 연속 서두를 장식했다. 성장이 최우선 정책목표로 제시된 것은 2010년 11월~2011년 2월 이후 처음이다. 용어 사용도 적극적이다. 이성태 전 총재는 ‘과도한 경기위축을 최소화’ ‘경기회복을 뒷받침’, 김중수 전 총재는 ‘견조한 성장세를 지원’이란 표현을 주로 써왔다. 이에 비해 이 총재는 수식어 없이 성장세란 말을 직접 사용한다.

‘성장세’라는 표현을 뒤따르는 단어 ‘지원하는’과 ‘이어지는’에 시장은 주목한다. 통화정책의 방향을 가늠하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는 얘기까지 나돈다. ‘성장세 회복을 지원하는 가운데’라는 문구를 쓴 기간과 기준금리를 인하한 시점이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한국은행은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 이후 경제가 어려워지자 7월에 ‘지원하는’이란 표현을 처음 쓰기 시작해 2015년 5월까지 유지하는 동안 2014년 8, 10월, 2015년 3월 세 차례 기준금리를 인하했다. 이 표현의 사용을 종료한 직후인 6월에도 기준금리를 낮췄다. 이에 비해 ‘성장세 회복이 이어지는 가운데’라는 표현을 쓴 2015년 6월부터 2016년 3월까지는 정책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 2016년 4~5월 다시 ‘성장세 회복을 지원하는 가운데’라는 문구를 사용한 후 6월 기준금리를 깜짝 인하했다. 6월부터는 다시 ‘성장세 회복이 이어지는 가운데’를 사용하고 있다. ‘지원하는’은 능동적인 정책 행위, ‘이어지는’은 관찰하겠다는 의도로 사용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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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관찰하는 ‘BOK 와처(watcher)’인 채권시장 관계자는 “한국은행은 의미 없는 말이라고 일축하지만 성장세에 뒤따르는 단어를 정책방향으로 해석하는 게 대체적인 시장 분위기”라고 전했다. 물론 그렇다고 현재 한은이 ‘성장 친화적’이라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허인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시장에 충분히 완화적인 통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시그널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의 조직설립 목적인 ‘물가안정’(26회)과 ‘금융안정’(25회)도 자주 등장했지만 발표문에 나오는 순서는 2~3순위였다. 물가안정 기조를 유지하는 한편, 기준금리 인하 이후 나타날 수 있는 금융시장 불안에 대응하겠다는 의도로 사용했다. 성장세를 가장 앞서 쓰기 시작한 2014년 7월부터 물가안정을 두 번째, 금융안정을 세 번째에 배치했다.

한국은행이 정책을 결정할 때 가장 염려하는 변수는 가계부채였다. 2014년 8월 첫 등장해 총 27회 쓰였다. 항상 두 번째 문장의 맨 끝에 배치되다 올 7월부터는 두 번째 문장의 가장 앞에 쓰고 있다. 6월 기준금리를 깜짝 인하하면서 예금은행의 가계대출 증가율이 6월 12.3%(전년 동기 대비), 7월 12.9%, 8월 13%로 가팔라지고 있어서다. 한국은행이 이달 기준금리를 동결한 것도 가계부채를 감안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최근 시장도 통화정책의 방향과 관련, 가계부채를 가장 주목한다. 미국이 연말에 금리를 올리더라도 가계부채 증가세가 유지되면 따라서 금리를 올리기가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강승원 NH투자증권 연구원은 “3분기 이후 가계부채 증가율이 꺾일 경우 기준금리 인하의 명분이 생기게 된다” 고 설명했다.

“오죽 답답하면 문구 표현이나 순서까지 보겠느냐”

‘자본 유출입’은 21회 사용했다. 횟수는 잦았으나 대부분 가장 마지막에 쓰였다. 7월부터는 문서에서 사라지고 대신 ‘기업 구조조정’이 등장했다. 이 밖에 주변 여건 변화에 대응하겠다는 의미로 ‘주요국’이 24회, ‘연준’이 7회 등장한다. 신흥국의 성장 둔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겠다며 ‘중국’ 7회, ‘지정학’이란 표현도 3회 등장한다.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펴면서 시장과의 소통하는 방식은 여럿이다. 통화정책을 결정한뒤 마이크 앞에 앉는 한은 총재의 언급이나 나중에 공개되는 금통위원 의사록도 시장을 향한 메시지다. 한은도 통화정책 발표문의 문구와 단어의 등장순서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발표문의 전체적인 맥락을 읽어달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익명을 원한 한 BOK 워처는 “오죽 답답하면 문구에 나오는 표현이나 순서까지 들여다 보겠느냐”며 “경제가 안갯속인데 통화정책을 책임지는 한은의 메시지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통화정책의 시그널을 시장은 잘 잡아채고 있을까. 요즘엔 오히려 시장이 앞서가고 통화정책이 뒤따라가는 형국이다. 한국은행이 2015년 6월 기준금리를 1.5%로 내렸음에도 국고채 3년물 금리(월 평균)는 기준금리 인하 전과 비슷한 1.7%대에 6개월간 머물렀다. 2015년 12월 미 연준이 기준금리를 9년 반 만에 0.25%포인트 전격 인상하자 불확실성이 해소되면서 국채 3년물 금리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올 2월에는 기준금리보다 낮은 1.4%대까지 떨어졌다. 한국은행이 불가피하게 6월 기준금리를 1.25%로 인하하자 1.2%대 초반으로 더 하락했다.

시장과의 소통도 매끄럽지 않다. 2015년 3월 연준이 금리 인상을 앞두고 성명서에서 ‘인내심 발휘’를 삭제하자 시장은 혼란스러웠다. 당시 한국은행은 2015년 1~5월 똑같은 향후 정책 방향을 제시하며 별다른 정책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한 채권 애널리스트는 “통화정책이 주요국과 우리 정부 정책에 지나치게 맞물린 탓에 한국은행보다는 연준과 정부 관료의 입을 더욱 주목하게 된다”고 최근 시장 분위기를 전했다.

김유경·박진석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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