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 돌풍으로 증시에 철 이른 한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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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국이 먹구름에 휩싸이자 증시엔 철 이른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당국의 통화긴축·증시규제·주식병합작업 등 악재가 겹쳐 가뜩이나 위축돼 있던 투자분위기가 예기치 않은 정국정색으로 말미암아 꽁꽁 얼어붙고 만 것이다.
「팔자」고 내놓는 매물은 쏟아져 나오는 데도「사자」가 나서지 않아 거래조차 없는 가운데 주가는 연일 급전직하다.
더 이상의 혹한이 다가오기 전에 증시를 빠져나가겠다는 아우성으로 하루평균 70억 원 이상의 증시이탈자금이 줄을 잇고 있다.
국회「국시」발언이 있던 14일 2개월 여 동안 버텨 오던 심리적「마지노 선」인 종합주가지수 2백50선이 무너지면서 증시는 급랭,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 17일까지 4일 동안에 무려 14·83포인트가 빠져 종합주가지수는 2백37·50을 기록, 지난 6월 중순 수준으로 되밀렸다.
과거에도 이 같은 정국불안에 따른 증시폭락 장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0·26이나 12·12, 5·17, 아웅산 사건 때도 주가폭락은 있었고 올 들어서도 정국에 관한 악성루머가 나돌아「4·24」대 폭락도 있었다.
그때마다 상당기간이 지나고서야 증시분위기는 다시 회복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국전망의 불투명으로 자칫하면 겨우겨우 쌓아 기반을 닦아 놓은 증시가 하루 아침에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정국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짙은 암운에 가려 있기 때문이다.
증시는 돈이 모여드는 곳이어서 생리적으로 경제상황은 말할 것도 없이 정치·사회 등 장외의 모든 현상에까지 민감하게 움직인다. 때로는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 장외의 기침한번에 감기를 앓기도 하는 것이 증시다.
지난해 말부터 증시는 삼성전자의 CB(해외전환사채)발행을 계기로 불붙기 시작,「3저」로 인한 경기회복, 자본자유화의 추진 등 호재에다가 정국의 개헌가능 무드까지 가세, 거의 일직선으로 오르막길을 치달았었다. 별다른 추가호재가 없었던 여름철마저 상승무드가 지속돼 지난 7월29일 종합주가지수 2백74·20의 최고봉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여야가 권력구조 문제를 놓고 티격태격하자 분위기가 약세로 돌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주식시장으로 돈이 계속 밀려들어 7월말 고객이 주식을 사기 위해 맡겨 놓은 예탁금규모는 2천8백억 원을 훨씬 웃돌았다. 그러던 것이 정국이 불투명해지자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해 급기야 17일에는 1천2백억 원대까지 줄어든 실정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투자자와 증권업계 쪽에선 증권당국에 모든 탓을 돌리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당국이 주가상승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 취했던 각종 규제 때문에 장이 회생불능의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규제만 없었거나 또는 이미 업계의 건의를 받아들여 해제됐더라도 증시가 이처럼 탄력을 잃지는 않았으리라는 주장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당국의 견해는 전혀 다르다. 최근 들어 주가가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연초보다는 50%가까이 올라 있어 여전히 높은 주가수준이라는 것이다. 또 워낙 돈이 많이 물려 있어 증시주변상황이 조금만 호전되면 다시 활황 세로 돌아설 것으로 예측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같은 판단이 정국경색의 장기화로 들어맞지 않을 경우 심각한 국면에 이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자본자유화의 추진으로 머지않아 외국인의 국내주식투자가 허용될 경우 증시침체에 따른 저 주가는 결국 외국인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 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난해 유럽시장에서 발행됐던 삼성전자CB가 현재 발행가격의 2배를 훨씬 웃도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는 점을 그 실례로 들고 있다.
따라서 당국이 인위적인 주가상승노력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더 이상 늦기 전에 증시규제를 눌어야 한다는 것이 증시주변의 주장이다.
정국전망이 불투명하고 찬바람이 느껴지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증시는 위축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일반 투자심리까지 위축시켜 경제에 타격을 주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다. <이춘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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