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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전세에서 월셋방으로 옮기는 안타까운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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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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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서울대 의대 교수
신경외과학교실

의사 생활 약 40년간 많은 부류의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 대부분 보통 사람들이었지만 지체 높은 고관도 돈 많은 부자도 진료했다. 정말 어려운 처지의 환자들도 적지 아니 만났다. 환자들과 심하게 다투기도 했고 심지어 소송을 당한 적도 있다. 퇴원하면서 건네는 조그만 마음의 보답도, 노력에 비해 과분한 선물을 받기도 했다.

완치돼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없는 즐거움이었다. 원망의 눈물을 보이는 사망 환자 가족에게는 죄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어쨌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 명 한 명 모두 소중한 생명이었다. 돌이켜 보면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환자들이 있다. 쓰라린 경험이나 치료 결과가 안 좋은 경우가 더 오랫동안 마음에 머물렀다.

우리나라 대학병원은 몰려드는 환자로 항상 북새통이다. 어렵게 외래 진료를 받았지만 입원과 수술을 하려면 또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입원의 안도감도 잠깐, 수술을 앞두고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다.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쌀쌀하기 그지없다.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진료하려니 사무적일 수밖에 없다. 한정된 병실과 수술실로 몰려오는 환자를 소화하기 쉽지 않다. 이것저것 고려해서 수술 일정을 짜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자칫 순서가 밀렸다고 생각하면 거세게 항의를 한다.

꽤 오래전 일이다. 남루한 차림의 40대 남자가 뇌종양 수술을 위해 입원했다. 불과 며칠 전 외래에서 진료했던 환자다. 입원까지 족히 한두 달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담당자에게 부탁해 빡빡한 수술 스케줄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 상태가 심각하고 악성종양의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수술 전날 회진을 하면서 병색이 완연한 환자를 만났다. 병상 옆에 어머니로 생각되는 할머니가 계셨다. 초췌한 환자와 달리 할머니는 씩씩한 모습이었다. 수술에 대해 설명을 드렸다. 그런데 할머니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수술을 1~2주 연기해 달라는 것이다. 살짝 짜증이 났다. 어렵게 일정을 앞당긴 수술인데 연기해 달라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환자인 아들과 단둘이 어렵게 살고 있었다. 아들은 특별한 직업이 없었고 가정도 스스로 이루지 못했다. 빠듯한 살림에 병원비를 마련할 길이 막막했다. 그동안은 할머니가 막일을 해 가며 그럭저럭 지냈다. 궁리 끝에 전셋돈을 빼기로 했다. 복덕방에 방을 내놓았으니 시간이 걸린다는 말씀이다. 전셋방을 나오면 어떻게 사실 것이냐 여쭈었다. 아무렴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겠느냐며 월세를 알아볼 예정이란다.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숨을 고르고 수술은 예정대로 하자고 말씀드렸다. 병원비는 천천히 갚을 수도 있다고 설명드렸다. 너무 안쓰러웠다. 뇌종양만 생각하고 사람을 못 봤던 것이 부끄러웠다.

큰 문제 없이 수술을 마쳤다. 예상대로 악성종양인 교모세포종으로 최종 진단됐다.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평균 기대수명은 안타깝게도 1년 남짓이었다. 원무과와 상의해 병원비를 분납하기로 했다. 하지만 퇴원 후 다시 모자를 만나지 못했다. 근심 어린 할머니의 얼굴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수술을 받지 않았다면 전셋방이라도 남지 않았을까. 마지막 남은 혈육을 잃었을 할머니는 어떻게 살고 계실까.

우리나라 복지정책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많은 발전을 했다. 의료 관련 복지도 선진국 못지않다. 불만스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비하면 정말 좋아진 것이다. 하지만 서둘러 시행하다 보니 보완해야 할 부분도 있다.

재작년 초에 송파구 세 모녀 자살 사건이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됐다. 많은 국민이 슬퍼했고 구멍 뚫린 국가 복지정책에 공분했다. 세 모녀 자살 사건을 접하면서 10여 년 전 경험했던 모자가 겹쳐졌었다. 양심과 염치가 있는 세 모녀와 모자의 불행을 보면서 몹시 안타까웠다. 최근에는 고위 공직자 어머니의 의료복지 수혜 논란으로 국민들은 답답하다. 이제 골고루 의료복지 혜택을 받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다 함께 노력해야 할 때다.

김 동 규
서울대 의대 교수
신경외과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