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수 특파원 필리핀 르포] "또 쿠데타?" 시민들 무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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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8일 오전 필리핀 마닐라의 마카티시(市) 알라야 거리. 대형 쇼핑몰과 고급 아파트 등이 몰려 있어 '마닐라의 압구정동'쯤 되는 곳이다.

이곳에선 전날 소장파 장교 등 2백96명이 20시간 동안 글로리에타 쇼핑몰을 점거하고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쿠데타를 시도했다.

쿠데타 군은 인터콘티넨털 호텔 등에 폭발물을 설치했다. 정부군은 탱크와 중무장한 병력을 대거 배치해 일촉즉발의 긴장이 짙게 깔렸다. 하지만 날이 밝은 뒤 거리의 모습은 전혀 딴판이었다. 군인들이 장전한 M16 소총을 들고 늘어섰던 지난밤의 긴박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시민들은 총총걸음으로 출근을 서두를 뿐이다.

쿠데타군이 한때 외국인을 인질로 잡았던 오크우드 프리미어 빌딩을 찾은 지주마르 비나이 마카티 시장은 "쿠데타는 완전히 끝났다"고 말했다. 쿠데타 배후로 지목돼 연금장소인 '참전용사 의료센터'에서 마닐라 근교의 아귀날도 캠프로 이송됐던 조셉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도 이날 새벽 의료센터로 돌아갔다. 모든 게 정상화된 듯했다.

물론 전날의 흔적은 아직 남아 있다. 프리미어 빌딩에선 무전기를 든 경비원들이 신분이 확인된 사람만 출입시켰다. 쇼핑몰에선 몸수색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그뿐이다.

인근 건물의 경비원인 이스라엘(37)은 "군인들이 살기 힘들어 불만을 터뜨린 것 아니냐"고 무심하게 말한다. 전자제품 가게의 20대 후반 점원은 "군인이라면 규율을 지켜 주장을 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못마땅해했다. 모두 하루 만에 편안하게 일상으로 돌아간 표정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일상적인 표정 뒤엔 정치안정과 경제회생을 꾀하는 아로요 정권을 강타할 정치적 난기류가 감지된다. 페닌슐라 호텔의 데이비드 배처러 총지배인은 "쿠데타 상황이 끝날 때까지 투숙객들에게 외부 출입을 하지 말도록 권고했다"고 말했다.

이 최고급 호텔은 외국 기업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필리핀에 마음을 뒀던 외국 기업인들의 투자심리가 위축되는 것은 불가피해 보였다.

아로요 대통령은 2001년 1월 '제2차 피플파워'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필리핀의 대처가 되겠다"고 했다. '강한 정부'를 표방한 것이다. 쿠데타 세력에 대해 "법에 따라 엄중 처벌할 것"이라고 다짐하거나, 쿠데타 당일 오후 상.하원 합동연설을 예정대로 강행한 것 모두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그녀의 뚝심도 정국의 요동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엄중 처벌은커녕 코미디 같은 형태로 사태가 수습됨에 따라 아로요가 '실세 군부'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게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가 수습됐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에 찬 부패한 군 고위층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다.

빈부격차와 부패.무능한 정권에 실망한 민심을 업고 각종 정파가 활개칠 조짐도 있다고 한다.

군부의 불만을 업은 엔릴레 전 국방장관이 권좌 복귀를 노리고 한편에선 "정부를 지키자"며 피플 파워를 강조한다. 그러나 필리핀인은 놀랍도록 무표정하다. 쿠데타와 피플파워의 악순환에 민심은 지쳐 있는 듯했다.

이양수 특파원

<사진 설명 전문>
필리핀 경찰이 28일 조셉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측근인 라몬 카르데나스(中)를 반란군 배후 조종 혐의로 체포한 뒤 그의 집에서 발견된 각종 무기를 조사하고 있다.[마닐라 로이터=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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