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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류전기 고집한 에디슨 꺾고 교류 표준 이끌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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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호 22면

테슬라가 1899년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세운 무선전송 실험실에서 수백만 볼트의 전기를 발생시키는 기기 앞에 앉아 있다. [사진 니콜라 테슬라 박물관]

니콜라 테슬라(1856~1943)는 시대를 앞서간 과학자이자 발명가다. 세르비아계 미국인 전기 엔지니어인 테슬라는 혁신적인 상상력과 추진력으로 전기 문명의 시대를 열었다. 그가 활동했던 뉴욕주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주는 그의 생일인 7월10일을 ‘니콜라 테슬라의 날’로 지정해 기념한다.


테슬라의 대표적인 업적은 오늘날 전세계에서 전기 발전과 송전의 기본인 교류 전기의 개발과 보급이다. 19세기 말 전기 사용이 확산하면서 전력 공급방식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토마스 에디슨은 직류(DC)를 선호했다. 전기가 음극에서 양극으로 일방으로만 흐르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문제가 많았다. 에디슨 자신이 발명한 전구조차 직류로 전기를 공급했을 때는 빛이 약하고 효율이 떨어졌다. 전기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송전하려면 전압을 고압으로 올려야 한다. 하지만 직류는 고압으로 승압하는 것이 쉽지 않아 2마일 이상 송전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는 미국 전역에 전기를 공급하려면 그 정도 간격으로 발전시설을 촘촘하게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상업적으로 실현 불가능했다.


하지만 테슬라가 개발한 교류는 1초에 50~60회씩 방향이 바뀌어 흐르면서 고압으로 승압이 쉽다. 이에 따라 장거리 송전이 가능하다. 전압을 크게 올려 장거리 송전 시 전력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도록 조절할 수도 있다. 테슬라는 전자 흐름 방향이 주기적으로 변하는 교류(AC)를 개발했다.

1 테슬라가 발명한 교류 모터.

테슬라는 185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스밀랸에서 세르비아계로 태어났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지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영토가 됐다가 지금은 크로아티아에 속한다. 한적하고 외진 인구 400여 명의 시골마을이다. 그는 1873년 크로아티아 중부의 카를로바츠의 레알슐레(중급 기술자와 공무원을 양상하기 위한 6년제 실업계 중등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전기를 공부하면서 낙차가 큰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의 엄청난 힘을 이용해 수력발전을 하는 꿈을 꿨다.


그 뒤 오스트리아 그라츠 공업대학과 보헤미아(지금의 체코)의 프라하 대학에서 공부했다. 대학을 마친 그는 188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전신회사에서 전기기사로 첫 발을 디뎠다. 1882년 친구와 부다페스트 공원을 산책하던 도중 오늘날 전세계에서 이용되는 교류 전기의 바탕을 제공하는 자기장 변환 현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모래 바닥에 나뭇조각으로 그려서 친구에게 보여줬다.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되기까지는 시간과 무대가 더 필요했다. 테슬라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에디슨 회사의 유럽 자회사인 컨티넨털 에디슨에 근무하며 직류를 생성하는 발전기인 다이너모를 디자인했다. 1883년에는 프랑스 동부 국경도시 스트라스부르(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패전으로 독일에 빼앗겨 당시에는 독일제국 영토였다)에서 머물며 교류전기를 이용한 모터를 개발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교류 모터와 교류발전기, 변압기, 송전장치 등 교류 발전에 필요한 기기를 모두 발명·고안했다.


하지만 그의 혁신적인 발명품은 당시 유럽에선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자 신대륙 미국행을 결심했다. 1884년 뉴욕행 배를 탔다. 그는 영국 출신의 미국 기술자이자 발명가로 에디슨의 오른팔이었던 찰스 뱃철러(1845~1910)의 추천장을 들고 에디슨을 찾아갔다. 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두 명의 위대한 사람을 안다. 한 사람은 당신이고 다른 이는 이 젊은이다.”

2 그의 이름을 딴 테슬라 모터스의 전기 차량 모델X.

이날 이후 테슬라는 59년 동안 뉴욕에서 살며 ‘전기 혁명’을 이끌었다. 테슬라는 뉴저지주 멘로파크의 에디슨 실험실에서 에디슨과 함께 일했다. 그곳에서 처음 맡은 일은 다이너모 라인을 개량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테슬라는 사장인 에디슨과 수시로 충돌했다. 두 천재는 특히 교류와 직류를 둘러싸고 이견을 드러냈다.


에디슨사를 그만두고 독자 실험실을 연 테슬라는 교류 발전기와 교류를 이용한 모터와 변압기를 개량해 최종 완성했다. 이 분야에서만 40개의 미국 특허를 얻었다. 이 특허는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구입했다. 웨스팅하우스사의 창업자다. 웨스팅하우스는 교류를 바탕으로 하는 테슬라의 전기 시스템을 미국 전역에 보급해 전기화하는 큰 꿈을 꾸었다. 천재와 그를 알아준 기업인의 결합이었다.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의 만남은 테슬라가 미국전기기술연구소에 자신의 모터와 전기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제출한 ‘직류 모터와 변압기라는 새로운 시스템’이라는 논문이 계기가 됐다. 전기 분야의 고전이 된 이 논문을 읽은 웨스팅하우스는 테슬라의 실험실을 찾았다가 더욱 놀랐다. 테슬라는 자신의 아이디어만으로 교류 시스템과 전압을 단계적으로 조절하는 변압기를 개발해 실험하고 있었다. 다른 쪽에는 교류를 이용한 모터도 돌리고 있었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의 완벽한 파트너십이 인류의 미래를 결정지었다. 웨스팅하우스는 테슬라의 교류형 전동기에 대한 특허권을 구입하고 산업용 교류전기를 공동으로 개발했다. 교류는 높은 전압으로 전류를 먼 거리까지 이동시킬 수 있는 것은 물론 가정에서는 변압기를 이용해 낮은 전압으로 전환시켜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


당시 에디슨은 자신이 구축한 ‘직류 제국’을 지키자는 욕심에 집착했다. 이미 1886년 60개의 에디슨 전력회사를 미국 각지에 세워 직류를 공급하고 있던 에디슨은 교류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에 따라 냉혹한 ‘교류-직류 전쟁’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에디슨은 윤리적 잘못을 범했다. 높은 전압으로 승압할 수 있다는 이유로 교류가 위험하다는 그릇된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주는 여론 조작에 나선 것이다. 에디슨은 전기의자를 이용한 사형 집행이라는 아이디어가 나오자 교정당국에 웨스팅하우스의 교류발전기를 사서 쓰라고 권고하기까지 했다. 웨스팅하우스가 교류 발전기를 감옥에 팔지 않자 에디슨은 남미에서 이를 구해 감옥에 전달했다. 결국 감옥은 한 사형수를 1700볼트의 교류를 8분간 흐르게 하는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대중은 교류가 위험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테슬라는 이런 불안을 불식하기 위해 전류를 자신의 몸에 통과하게 하는 등 눈물겨운 실험으로 교류의 안전성을 홍보했다.


하지만 결국 189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에서 웨스팅하우스가 전등과 전기 공급을 계약함으로써 교류가 승리하게 됐다. 고압상태로 승압시켜 장거리를 효율적으로 송전할 수 있게 하는 능력과 이를 감압시켜 가정에서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평가를 받았다. 그해 웨스팅하우스와 제너럴일렉트릭사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테슬라의 설계를 받아들여 세계 최초의 수력발전 시스템을 교류 방식으로 설치하기로 계약했다. 청소년기의 꿈을 이룬 것이다. 의회에서 교류를 표준으로 채택하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교류와 직류의 지루한 싸움은 결국 테슬라의 승리로 끝이 났다. 교류는 20세기 전기의 표준이 됐다. 반면 에디슨의 직류는 전지로 작동되는 기기에서나 남아있을 뿐이다.

3 세계 최초의 리모트 컨트롤 기기.

테슬라는 1891년 높은 전압, 낮은 전류, 높은 진동수의 교류 전기를 만들 수 있는 테슬라 코일을 발명했다. 이는 지금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비롯한 다양한 전기기구에 사용된다. 조명, 엑스선 발생, 고주파 발생, 전기요법, 무선 전기에너지 송신 등에도 사용되는 기기다. 테슬라는 그해 미국 국적을 얻었다.


형광조명, 레이저 빔, 무선통신, 무선송전, 리모트 컨트롤 시스템, 로봇기술, 터빈과 수직 이착륙 비행기 등 테슬라의 발명 업적은 끝이 없을 정도다. 그는 라디오와 현재 전자 전송기기의 아버지로 불린다. 전 세계에 700가지 이상의 발명특허를 등록했다. 그는 1895년 빌헬름 뢴트겐이 X-레이를 개발한 것과 거의 동시에 독자적인 X-레이 튜브를 발명했다. 테슬라는 X-레이로 인간의 모습을 찍어 ‘전기 리뷰’지에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뢴트겐의 업적을 존중해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지 않았다.

4 1904년에 세운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 실험시설.

1896년 무선 시스템에 대한 특허도 얻었다. 그는 전파 전송에 필요한 시스템을 발표했는데 이는 나중에 마르코니가 세계 최초의 무선통신을 할 때 이용됐다. 테슬라는 1899년 콜로라도주 콜로라도스프링스에 무선 전송용 실험시설을 설치했다. 1901년 마르코니는 영국과 캐나다 뉴펀들랜드 간의 대륙간 무선통신 실험에 성공했다. 1943년 미국 대법원은 무선통신에 관한 마르코니의 특허를 무효화했다. 테슬라의 기여가 무선기술 발명에 더 크게 기여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는 태양열과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해 전기를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우주에서 행성 간의 통신과 인공위성이라는 개념도 고안했다. 21세기 혁신의 벤처 기업인 일런 머스크가 자신이 세운 전기자동차 회사에 ‘테슬라 모터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런 테슬라의 업적을 기려서다.


테슬라는 1943년 1월7일 호텔뉴요커 33층에 있는 3327호실에서 홀로 숨진 채로 발견됐다. 테슬라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세상을 떠나는 길은 외롭지 않았다.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부통령 헨리 월리스를 비롯한 주요인사들이 조전을 보냈고 세인트 존스 대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2000명이 넘는 사람이 몰렸다. 그의 유해는 뉴욕에서 화장됐으며 재는 생전에 좋아했던 황금빛 공모양의 용기에 담겨 베오그라드의 테슬라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세르비아는 수도 베오그라드의 국제공항을 ‘니콜라 테슬라 국제공항’으로 부르고 있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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