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뺑소니 차량은 당신이 '범인'임을 알고 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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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8일 오전 4시45분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지하철 8호선 모란역 인근 왕복 8차로 도로에서 뺑소니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음주상태였던 운전자 A씨(50)가 무단횡단하던 B씨(34)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들이 받은 것이다. 술을 마신 데다 사람을 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던 그는 비상등을 켠 채 잠시 주춤하다 현장을 벗어났다. 인적이 드문 새벽 시간인 데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목격자가 없으리라 여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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뺑소니 사고 사망자 B씨의 사고 전 모습(붉은 원안)[사진 경기 성남수정경찰서]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는 화단 위로 쓰러져 있던 B씨는 아무런 구호조치를 받지 못하다 결국 숨졌다. 하지만 경찰수사 8일만에 A씨는 붙잡혔다.

사건 현장에서 나온 단서라고는 5㎝ 길이의 차량 전조등 파편 2점이 전부였다. 하지만 현장 주변이 사고다발 구간이어서 당시에는 단서라고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찰은 사건 현장을 중심으로 반경 5㎞ 내에 설치된 100여 대의 폐쇄회로TV(CCTV) 영상을 분석하고, 범행 현장 주변을 지난 차주에게 일일이 연락해 확보한 40여 개의 블랙박스 영상 등을 통해 ‘퍼즐 조각’을 맞춰 나갔다. 영상 분석 중 2대의 승합차 블랙박스에서 단서를 발견했다. 사고 추정시간 5분전 촬영된 블랙박스 영상에는 없었던 B씨가 그로부터 10분 후쯤 촬영된 다른 영상에는 등장한 것이다.

이후 경찰은 교통신호에 주목했다. 정지신호가 주행신호로 바뀌면 편도 4차로에 정차했던 7~10대의 차량들이 대체로 무리를 이뤄 달리고, 주행 중 별다른 이상이 없다면 무리가 바뀌지 않을 것이란 점에 착안, 분석에 나섰다.

예상은 적중했다. 앞서 확보한 CCTV에 등장하는 차량을 다섯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선두로 달리다 갑자기 후미 무미에 합류한 차량이 있었던 것이다. 추적 결과 이 차량은 성남의 한 공업사에 수리가 의뢰된 상태였다. A씨가 자동차 보험회사에 “가로수를 들이받았다”고 말한 후 공업사를 찾아온 것이었다.

차량 앞유리와 범퍼·본닛 등은 분리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차량에서 나머지 퍼즐의 한조각이 맞춰졌다. 대시보드에서 B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카락 세 가닥이 나온 것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분석결과 B씨 DNA와 일치했다. 경찰은 A씨를 도주차량 혐의로 붙잡았다. 사건발생 8일만이다.

당시 사건을 이끌었던 성남수정경찰서 박중칠 교통조사계장은 “A씨는 사고장소를 평소처럼 다니는 뻔뻔함을 보였다”며 “교통사고 후 아무런 조치 없이 도주하는 것은 살인범죄와 같다”고 말했다.

뺑소니 사고 현장 주변 CCTV와 도로 위를 감시하는 블랙박스, 사고로 부서진 차량 등은 범인을 알고 있다. 지난 9월 9일 부산에서 7세 어린이를 숨지게 한 뺑소니 교통사고 역시 9일만에 범인이 붙잡혔는데, 사고 현장에 떨어져 있던 자동차 부품인 휠가드가 결정적 단서가 됐다. 앞서 지난 7월 강화에서 발생한 70대 폐지수집 노인 뺑소니 사고는 예상 도주로에 설치된 CCTV영상으로 용의자 특정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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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아동(7) 뺑소니 사건의 결정적 단서가 된 차량 부품. [사진 부산사하경찰서]

경찰의 뺑소니 사건 피의자 검거율은 98% 수준을 보이고 있다. 경찰청의 ‘2016년 상반기 뺑소니 교통사고 분석’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발생한 전체 뺑소니 사고는 4001건으로 이중 3926건(98.1%)이 검거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할 때 발생건수는 13.2% 감소하고, 검거율은 1.9% 상승했다. 특히 뺑소니 사망사고의 검거율은 100% 수준이다. 경찰 관계자는 “뺑소니 사건의 범인은 대부분 3일 내에 잡힌다”고 말했다.

경기대 이수정(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도로 위 CCTV와 차량 블랙박스, 소셜네트워크(SNS)를 통한 시민 고발 등으로 뺑소니 범인은 결국 잡힌다”고 말했다.

성남=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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