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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스스로 준비하는 노후, 정부가 도와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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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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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창
생명보험협회 회장

어제 우연히 택시를 타고 개인택시 면허를 가진 기사분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요즘 은퇴자가 늘어서 개인택시 면허 가격이 높아진다니 좋으시겠습니다” 하고 던졌더니 기사분은 “면허 가격이 오르면 뭘 합니까? 이제 곧 자율주행차들이 나오면 택시기사들이 다 없어질 판인데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택시기사와의 짧은 대화 속에 다가오는 미래의 충격 두 가지가 다 들어 있었다. 하나는 급속하게 현실로 파고드는 4차산업 혁명이고, 또 하나는 저출산·고령화다.

4차 산업혁명 속도 빨라지는데
저출산·고령화로 복지부담 커져
퇴직연금 등 지원 확대하면
장기적 재정 압박 덜 수 있어

4차산업 혁명을 보자. 지난 8월 17일 미국 포드자동차는 2021년부터 핸들과 가속·브레이크 페달이 없는 완전 자율주행차를 시판한다고 발표했다. 강원도 속초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게임인 포켓몬고가 국내에서 유일하게 시현되면서 올여름 휴가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미국에서는 경찰을 사살한 용의자를 진압하는 현장에 로봇이 직접 투입됐다. 구글의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인 알파고가 프로기사 이세돌에게 승리한 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 됐고, 금융도 디지털화되고 모바일화되면서 10년 안에 실물화폐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저출산·고령화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조금 나아진 출산율이 1.24명으로 포르투갈과 세계 꼴찌를 다투고 있고, 초등학생 수는 9년 만에 웬만한 광역시 인구인 159만 명이나 줄었으며, 2040년이면 국민 세 명 중 한 명은 65세 이상 노인인 사회가 될 것이다. 인구학자 조영태 교수에 따르면 지금의 출산율이 지속되면 2019년부터는 한 해 출산인구가 30만 명대로 줄어든다고 한다. 부모 세대는 한 해에 100만 명씩 태어났는데 자녀 세대는 30만 명대로 줄어드는 것으로, 한 세대 만에 출산인구가 절반 아래로 떨어진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다.

4차산업 혁명과 저출산을 바라보는 시선의 기저는 ‘불안’이다. 정보기술(IT) 혁신은 인류의 생활에 안전과 편리함, 노동을 감소시켜 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필연적으로 일자리 감소를 몰고 올 것이다. 올해 다보스포럼에서 발표된 미래고용보고서는 4차산업 혁명으로 향후 5년간 710만 개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예측했다. 일자리뿐만 아니라 4차산업 혁명의 대열에 끼지 못하는 국가나 대형 기업은 경쟁에서 탈락하고 회복은 불가능할 것이다. 저출산·고령화 역시 심각한 경제위축과 국가재정지출의 증가를 야기하고 경제성장률을 지속적으로 하락시킬 것이다. 『인구절벽』의 저자 해리 덴트(Harry Dent)가 한국에서 인구절벽이 시작되는 해로 지목한 2018년이 이제 2년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인구절벽이 시작되면 대대적인 디플레이션으로 주식과 부동산 가격의 급락이 수반될 것으로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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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앞으로 2~3년이 골든타임이다. 국가의 중추산업을 조선·철강·해운 등 무거운 산업에서 첨단산업과 금융산업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또한 신기술과 창의적 아이디어, 융합 비즈니스가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인해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규제를 정비하는 것이 핵심이다. 과감하게 없애든가, 네거티브 방식으로 최소화해야 한다. 저출산·고령화도 수백 가지 아이디어를 중구난방으로 늘어놓기보다는 총괄하고 조정할 독립적인 기구부터 설치해야 할 것이다. 복지·여성·의료·교육·취업·안보 등을 연계할 수 있는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그리고 충분한 권한을 가진 컨트롤타워가 시급하다. 내각에 ‘1억총활약상’을 설치해 출산율을 1.46명까지 끌어올리면서 목표인 1.8명에 착실히 다가가고 있는 일본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바둑의 전략적 요결을 담은 ‘위기십결(圍棋十訣)’에 공피고아(攻彼顧我)라는 말이 있다. 상대를 공격하려거든 그 전에 자신을 먼저 살피라는 의미다. 우리가 4차산업 혁명과 저출산·고령화와의 전투를 앞두고 미리 살펴야 하는 아픈 발목은 복지다. 내년 우리나라 복지예산은 130조원으로 올해보다 5.7%나 늘어났으며 전체 정부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2.4%에 달한다. 복지예산은 2020년까지 매년 5.3%씩 꾸준히 늘어날 예정이다.

복지예산을 줄일 유일한 열쇠는 국민들이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다. 정부는 공적연금과 사적연금 간의 상호관계와 역할에 대해 체계적인 검토를 해야 한다. 독일은 2001년 발터 리스터(Walter Riester) 노동부 장관이 ‘재정에 기반한 공적연금’ 기조에서 ‘사적연금에 대한 정부보조’로 혁신적인 전환을 추진해 재정지출 구조를 크게 개선했다. 미국 역시 공적 보장을 크게 축소하는 대신 사보험인 퇴직연금과 개인퇴직계좌(IRA)에 대한 세제혜택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

장기적인 복지지출 절감으로 줄어드는 재원을 다시 저출산 해소나 IT 산업 육성으로 활용하는 선순환 사이클을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 임기 5년, 국회의원 임기 4년, 경영인 임기 3년의 한시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20년, 30년의 미래를 설계하는 장기 비전이 필요하다.

이수창 생명보험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