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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 보낸 사람이 부조도 했나…란파라치, 방명록 몰카 촬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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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 시행 이후 맞은 첫 주말인 지난 1일 오후 6시쯤, 기자는 서울 서초구 G공익신고학원을 찾아갔다. 김영란법 위반자를 적발해 포상금을 받는 방법을 알려 주는 일명 ‘란파라치(김영란법+파파라치)’ 양성 학원이다. 교육 수강생 이모(56·자영업)씨와 박모(57·퇴직자)씨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장례식장 출동 3명 따라가보니
상주 측에 “○○씨 조문 왔나” 묻자
의심 없이 보여주는 방명록 찰칵
“법 위반 가능성 있는 2건 찾아”
시계·가방·안경 등에 몰카 숨겨
“사생활 보호안 마련해야” 여론도

두 사람은 최근 이 학원에서 김영란법 위반자를 손쉽게 단속할 수 있는 비법 등 이론 교육(총 3시간30분)을 받은 수강생이다. 이들은 이날 서울의 한 병원 장례식장으로 첫 현장 출동을 앞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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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서울시내 한 ‘란파라치’ 학원에서 관계자가 현장으로 나가기에 앞서 몰래카메라를 시험 작동하고 있다. [사진 신인섭 기자]

이 학원의 문성옥 대표가 몰래카메라 사용법과 현장활동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몰래카메라는 소매 끝 안쪽에 숨겨 촬영이 가능한 형태였다. 이 학원 강의실 한쪽 장식장 안에는 안경부터 모자·라이터·명함지갑 등 다양한 형태의 몰래카메라가 진열돼 있었다. 학원 관계자들은 최근 일부 란파라치 학원이 수강생들에게 몰래카메라를 시중가격보다 비싸게 팔았다는 비판 보도를 의식한 때문인지 가격은 철저히 함구했다. 수강생 이씨 역시 “수강료라고 생각한다”고 잘라 말했다.

문 대표는 잠시 후 출동할 장례식장에서 보게 될 주요 적발 의심상황을 사전에 설명했다. 일종의 작전타임이었다. 호상소(護喪所)에 30만원의 조의금이 들어올 경우 ‘경조사비 상한 10만원’이라는 김영란법 예외 규정을 맞추기 위해 조의금 접수자가 차액 20만원을 의미하는 ‘-2’로 적는지를 잘 챙겨 보라고 당부했다.

오후 6시40분, 초보 ‘란파라치들’이 김영란법 위반자를 찾기 위해 장례식장으로 출발했다. 점검 대상자는 이 학원이 미리 신문 부음란 등을 통해 사전에 파악해 둔 인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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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파라치들이 사용하는 안경?시계?라이터?가방 등에 부착된 몰카. [사진 전민규 기자]

몰래카메라를 장착한 수강생 이씨가 빈소 입구 주변에 일렬로 놓인 조의 화환을 임의로 쭉 촬영했다. 동행한 문 대표도 한 손에 쥐어질 정도로 작은 손가방 형태의 몰래카메라로 보충 촬영을 했다. 수강생 박씨는 의심 가는 조화를 눈으로 일일이 살펴봤다.

조화를 보낸 사람이 조의금까지 이중으로 냈는지를 확인할 증거를 찾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호상소에서 문 대표가 “김○○씨가 조문을 왔느냐”고 물으니 상주 측에서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방명록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명부를 확인해 줬다. 명부 속 이름은 몰래카메라 렌즈에 그대로 노출됐다. 상주 측에서 “조문을 오지 않았다”고 하면 문 대표는 “아직 오지 않았네”라며 옆에 있던 란파라치에게 “어서 연락해 같이 조문 드리자”고 능청맞게 연기했다.

이날 현장활동은 빈소 3곳에서 40분가량 진행됐다. 화환의 리본에는 모 대학병원 관계자, 경기도 내의 한 지자체 관계자, 기업 대표 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현장활동을 마친 문 대표는 “김영란법 위반 가능성이 있는 사항을 2건 정도 찾았다”고 말했다. G공익신고학원은 이날 장례식장에서 수집한 자료를 분석해 위법사항이 드러나면 당국에 신고할 방침이다.

기자에게 자영업자라고만 신분을 밝힌 수강생 이씨는 란파라치로 나선 이유에 대해 “부업으로 공익신고활동을 하게 됐는데 사회를 정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퇴직자라고 밝힌 수강생 박씨는 “퇴직 후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하다) 공익신고요원 일을 알아보게 됐다. 사생활을 캔다는 비난보다 법 위반사항을 적발하는 공익적 기능이 있지 않느냐”고 했다. 란파라치 활동이 어느 정도의 수입(포상금)을 보장해 줄지에 대해 두 사람은 아직 확신을 갖지는 못했다.

란파라치 양성 학원을 운영하는 이유에 대해 문 대표는 “실정법을 어기려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경각심을 심어 주고 싶다. 탈세자를 찾아내는 ‘세파라치’처럼 공익신고는 세수 증대에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선 아직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앞으로 란파라치들이 활개 칠 경우 적잖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400만 명이나 되는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를 잠재적 범법자로 간주하면 공직사회가 지나치게 움츠러들고 법 적용 대상자와 주변인들의 사생활까지 침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권혁성 아주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부정청탁을 금지한 (김영란법의) 취지는 좋지만 무분별한 란파라치 활동이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 부작용을 줄일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수원=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사진=신인섭·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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