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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와 창극의 변증법적 만남, 첫발 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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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호 30면

판소리가 서사라면 창극은 그 극장식 확장이다. 하지만 소리꾼 혼자 시공간을 넘나들며 드라마를 완성하는 초현실적 양식미만으로 미학적 가치를 칭송받는 판소리에 비해, 지난 한 세기 동안 창극은 독보적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해 왔다. 2012년 이후 쉬지 않고 계속되어 온 국립창극단의 실험은 창극의 예술성을 획득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2016-17 국립극장 시즌 개막작으로 공연된 이소영 연출의 오페라 창극 ‘오르페오전’은 그 몸부림의 절정이라 하겠다. 지난해 판소리 원형에 충실하면서도 모던하게 재해석한 ‘적벽가’로 호평받았던 이 연출은 이번엔 작심한 듯 창극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왜 ‘오르페오’일까. ‘오페라 창극’으로 판소리의 외연을 서양 음악극으로 확장하겠다고 선언한 그는 현존 최고(最古)의 오페라로 꼽히는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에서 오페라의 원류적인 위상을, 오페라 개혁의 아이콘인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서 그 혁명적인 위상을 빌어와 우리의 ‘장자못 설화’에 연결지음으로써 그 당위성을 확보하고 나선 것이다.


이 최초의 ‘오페라 창극’이 대체 어떤 형식을 보여줄지 의문이었지만, ‘오르페오전’은 새삼 오페라가 ‘종합예술’의 대명사임을 환기시키는 거대한 스케일의 무대였다. 연출가가 스태프진을 적당히 꾸려 만든 한 편의 극예술이라기보다는, 작곡가와 안무가·무대미술가·영상디자이너가 저마다 예술가로서의 역량을 극대화해 협업한 시청각적 총체극이라 하겠다.


개막 전 “창극은 창자의 소리로써 직접적인 이야기로 풀어가는 데 반해 오페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음악으로 풀 것인가가 관건”이라고 했던 것처럼, 이 연출은 음악과 무대를 전면에 내세우고 이야기는 그 속에 함축시켰다. 대본까지 직접 쓴 그가 자신이 세 차례나 제작했던 오페라 ‘오르페오’에 대한 오마쥬를 거대한 서정시조로 완성한 모양새다.


원전인 그리스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는 죽은 아내를 구하러 명계로 내려간 음악가 오르페우스가 지상에 도달할 때까지 뒤돌아보지 말라는 신과의 약속을 어겨 결국 돌로 변하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시시콜콜 들려주지 않는 ‘오르페오전’은 서사가 흐르는 드라마가 아니라 서정이 흐르는 시적인 무대였다. 어른을 위한 한편의 동화라고 할까.


‘올페’와 ‘애울’의 운명적인 만남부터 오페라 서곡처럼 아련하게 묘사된다.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하고 왜 사별하게 됐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서로를 알아본 인연의 기적과 연을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 사랑의 기쁨, 연줄이 끊어지는 듯한 이별의 슬픔이라는 정서 자체가 노래와 음악에 담겨 120분 내내 휘몰아친다.

서사가 없어도 지루할 틈 없는 건 버라이어티한 볼거리의 향연을 차려낸 감각적인 무대 연출의 힘이다. 거대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인연을 상징하는 방패연 몸체로 온전히 활용한 경사회전무대가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거울의 앞뒷면이 되고, 산과 바다, 조각보와 별자리 등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영상과 조명이 360도로 다양한 장면을 만들어 낸다. 연줄에 매달려 하늘을 나는 와이어 액션에 현대무용과 힙합 춤을 추는 군무까지, 한국적인 모티브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스펙터클하게 뽑아낸 무대는 흡사 올림픽 개막 공연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음악은 판소리의 가창 부분만을 극대화시켰다. 숨넘어가는 호흡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아니리는 일부 랩으로 흔적만 남겼고, 올페와 애울의 ‘창(唱)’은 사랑의 아리아가 됐다. 서양적 멜로디에 얹혔지만 성음과 시김새 등 판소리 가창 특성을 살린 김준수·이소연 등 소리꾼들의 노래는 서정적이면서도 파워풀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황호준 작곡가는 소리를 따라가는 수성가락 반주를 넘어 적극적으로 극을 이끌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음악과 음향으로 창극 음악의 독립적인 위상을 개척했다 할 만하다.


판소리의 말맛과 장단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이게 무슨 창극이냐”는 기성 팬들의 반발도 나온다. 춘향전이나 심청전이었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소영 연출은 ‘오르페오’를 데려와 창극의 외연을 넓힌 ‘최초의 오페라 창극’이란 영리한 노선을 취했다. 기존 창극의 틀 안에서 레퍼토리를 하나 추가한 것이 아니라 ‘서양 오페라와 우리 창극의 변증법적 만남’을 내걸며 새 출발의 발걸음을 뗀 것이다. 동서양의 경계를 허문 이야기와 음악, 각 분야 예술가들의 첨단 감각이 총동원된 무대 미학으로 국립창극단의 예술적 실험에 정점을 찍은 ‘오르페오전’은 창극의 정체성 논란을 떠나 ‘오페라 창극’이란 새로운 장르의 원류로 자리매김되어야 할 것이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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