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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재현의 시시각각

말할 때와 침묵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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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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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논설위원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은 통상과는 다른 형식을 취했다. 통영함 납품 비리 혐의로 구속됐던 그는 1, 2심에 이어 대법원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최고 법원의 입장에선 “관여 대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상고를 모두 기각하고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는 짤막한 문장으로 대신하는 게 어찌 보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17쪽짜리 판결문을 통해 검찰의 기소 내용에 대한 재판부 입장을 설명했다. 1, 2심과 비교할 때 크게 다른 내용도 아니었다. 재판을 담당했던 대법관들이 통상의 도식적 형태를 물리치고 자세하게 판결문을 작성한 배경은 무엇일까.

황기철 무죄에 책임지는 모습 필요
강만수 향한 모멸적 표현 정도 아냐

‘엄숙주의’의 관행을 깬 이유 중 하나는 사건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설명해 줄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검찰 기록을 보면 황 전 총장이 방위사업청에 있을 때 의례적으로 서명을 한 것 같은데, 검찰이 이를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의 공범으로 몰아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대법원도 검찰의 부실 수사를 지적하려 했던 거다.

검찰 수사는 박근혜 대통령이 방위사업 비리를 이적행위로 규정하면서 시작됐다. 비등하는 비난 여론에 의해 사실상 ‘매국노’로 덧칠된 그는 2년 임기를 7개월 앞두고 전역했다. 이어 마치 해적 취급을 받으며 검찰에 소환된 뒤 구속됐다. 30여 년의 군 경력은 물거품이 됐다. 서울 목동의 아파트 한 채가 전 재산인 가족에게 5억원 안팎의 변호사 비용은 큰 부담이었다. 딸은 퇴직금을 정산했고 부인은 학원강사를 하면서 옥바라지를 했다. 황기철은 대법원 판결을 받고 외국에 체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눈과 귀를 검찰로 돌려 보자.

검찰의 그 누구도 황기철에 대한 최종 판결과 관련해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다. 6만9000여 명 해군 조직의 총 책임자가 무죄를 받았는데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넘어가도 되는 일인가. 대한민국 4성 장군의 자리가 이토록 하찮고 가볍단 말인가. 이웃 일본의 검찰만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의 목을 내놓고 수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선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

수사권도 독점하고, 기소권도 독점해 놓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면 비겁한 것 아닌가. 황기철 개인과 그 가족의 문제를 넘어 해군 조직의 명예와도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나서야 할 때와 물러날 때를 명확히 하지 않으니 국민의 불신은 커지고 그만큼 권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최근 대우조선해양 사건과 관련해 수사 대상이 된 강만수 전 산업은행장에 대한 검찰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강 전 행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검찰 관계자는 “권한을 이용한 지속적 사익추구형 부패사범”이라고 모질게 말했다. 몇 달간 수사를 통해 취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70년을 살아온 한 사람의 인생을 한 칼에 재단하는 듯한 표현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대우조선해양의 부실과 관련된 강 전 행장의 책임은 검찰 조사에서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검찰이 이미 7년 전 남상태 사장의 불법 사실을 포착하고도 뭉갠 이유 중에는 법조계의 고질적 비리인 전관예우가 작동한 것을 많은 사람은 알고 있다. 수많은 부실의 원인을 한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듯한 태도는 보기에 따라서는 화풀이로 비칠 수도 있다.

검찰에 구속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선 것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절박하고 필사적이다. 이 때문에 칼을 쥔 입장에선 눈 깜짝할 사이에 단죄를 하는 것이 최선이다. 영국의 헨리8세나 중국의 조조가 최고의 칼잡이를 동원해 둘째 부인과 자신의 생명을 살려줬던 은인을 단칼에 베게 한 것도 사람에 대한 예의 때문이었다. 그만큼 세상에 대한 원망을 줄여 주기 위해서였던 거다.

우리의 검찰도 이제 거친 숨을 고를 때가 됐다. 정작 사죄의 말이 필요할 땐 침묵하고, 침묵이 요구될 땐 큰소리치면 점점 따돌림의 대상만 될 뿐이다.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