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에 갇힌 詩 싫어 무대의 언어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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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조각.미술평론 등으로 활동반경을 넓혀 온 시인 황지우(51.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씨가 1995년 발생했던 삼풍백화점 참사를 소재로 한 희곡 '물질적 남자'를 현대문학 8월호에 발표했다.

황씨의 희곡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황씨는 99년 광주 민주화 항쟁을 다룬 희곡 '5월의 신부'를 완성했고,이듬해 무대에 올렸다. 이번 '물질적 남자'도 학교 동료인 윤정섭 교수가 연출을 맡아 다음달 29일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상연된다.

황씨와 연극의 인연은 좀더 뿌리깊다. 90년대 초반 황씨의 시 작품을 연극으로 만든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등이 무대에 오른 바 있다.

궁금한 것은 '시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 작파했나?'하는 점이다. 황씨는 실험성 높은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발표한, 80년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거론된다.

99년 발표한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저항의 80년대를 보냈지만 안전하게 된 90년대 들어 '아파트 실평수처럼 늘 초과하는 삶의 덩어리'를 어쩌지 못하는 30~40대의 내면을 다뤘고, 연애 시집 아닌 본격 시집으로는 드물게 베스트 셀러가 됐다. 때문에 희곡도 희곡이지만 그의 시작(詩作)이 궁금하다.

-시는 안쓰나.

"고압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시적 긴장상태를 하루 24시간, 1년 3백65일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살다가 시적 상태에 빠질 때 시가 나온다. 일반인도 바닷가에서 노을을 볼 때 누구나 시인의 감성에 빠진다. 요즘 나는 이를 희곡이라는 그릇 속으로 흘러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여긴다. 아다시피 희곡은 문학에서 워크아웃(퇴출)된 상태다.

-그런데 왜 희곡인가.

"장사 잘 되는 영화에 비해 고물, 골동품이 되어가는 장르에 흥미를 느낀 것으로 봐달라. 물론 소포클레스 이래 셰익스피어 등 대천재들이 다 사용해 버린 장르에 시상을 담는 일이 뒤늦은, 무모한 일 같기도 하다. 하지만 생동하는 삶을 담고 싶은 욕구 때문에 시 대신 희곡에 관심을 쏟는 거다."

-시에는 생동하는 삶을 담을 수 없었나.

"내 시뿐 아니라 많은 현대시가 시집에 인쇄된 활자에 갇힌 느낌이다. 시는 원래 노래였는데 내 시는 읽기 힘들고, 내 시 중 외우고 있는 시도 거의 없다. 시를 소리로 듣기보다 눈으로 보기만 하면서 시인의 음성의 미세한 떨림을 느낄 수 없게 됐다. 듣는 사람이 시인의 떨림을 공유할 수 있는 예민한 울림통이 연극이라는 생각이 든다."

황씨는 "'물질적 남자' 공연 시작 첫 10분간 관객들은 깜짝 놀랄 것"이라고 말했다. 백화점이 무너지는 상황을 실감나게 재현했다고 한다. '물질적 남자'는 사고가 발생한 지 8년이 넘도록 백화점 부지 지하에서 생존해 온 중년 남자를 통해 "오늘의 부박한 삶, 믿음이 가지 않는 삶의 제 조건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본" 작품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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