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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유적의 보고 집안|중공의 관광지 개방 계기로 알아본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집안은 어떤 땅인가.
4백여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던 중국길림성 집안(현재는 집안으로 표기)을 중공당국이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겠다는 최근의 외신보도는 우리의 관심을 끌고있다. 학자들의 답사기와 연구성과를 토대로 집안의 이모저모를 알아본다.

<집안이란 곳은>
집안현은 길림성의남부, 압록강 중류에 자리잡고 있다. 큰 산과 깊은 계곡속에 뱀처럼 꿈틀거리는 노령산맥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그 멀리 보이는 연봉들은 북한땅. 그 사이로 압록강이 유유히 흐른다.
북경에서 집안까지는 기차로 30시간쯤 걸린다. 심양·서평·통화를 거쳐간다.
만주벌판에서 이곳으로 통하는 길은 단 2개밖에 없을 정도로 집안은 첩첩산중에 있다. 강력한 기마국단에 의지한 고구려가 어째서 이런 곳에 수도를 두었을까 하는 문제는 학자들의 의문으로 남아있다. 건설기의 고구려가 국난속에서 산악에 의지한 독특한 방어전법을 구사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고구려는 기원3년 시조동명왕의 뒤를 이은 유리왕이 지금의 집안현성, 즉 국내성에 천도한 후 427년 평양으로 옮길 때까지 이곳에 웅거했다. 집안은 당시 고구려 정치·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이곳을 비롯한 길림성·묘령성일대는 고구려 유물·유적의 보고가 됐다.
국내성과 광개토대왕비를 비롯, 환도산성·장군총·태왕릉등이 모두 이곳에 있다. 그 후 발해도 여기에 유적들을 심었다.

<광개토대왕비>
집안의 동쪽 4km지점에 있다. 높이 6·4m로 장수왕2년(414년) 에 세워진 방주형 거비.
4면에 1천8백여자를 새겨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고있다. 4∼5세기 한·중·일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풀 귀중사료. 현재 「비문변조설로 한일 사학계의 쟁점이 돼있다. 中共당국은 이 비를 국보급 사적으로 지정,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장군총>
광개토대왕비의 동북방 4·5km,승용차로 7∼8분거리에 있다. 거대한 화강암을 깎은 돌로 쌓아올린 7층 방형의·분묘로 원형을 유지한 고구려 유일의 적석총. 기저의 한변길이 33m, 높이는 13·6m . 묘역은 한변 1백m.철제계단을 따라 정상까지 오를 수 있고 석실내부도 참관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와 이웃하고 있어 장군총을 광개토대왕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태왕릉>
광개토대왕릉의 또 하나의 후보. 국내성과 광개토대왕비 사이에 있다. 묘역은 한변 3백m, 기저의 한변이67m나 되는 거분. 장군총을 능가한다. 석축은 파괴된지 오래다.「현태왕릉안여산고여악」이란 명문이 나오고 광개토대왕이 일명 호태왕이며 고구려의 다른 국왕명에 태왕·대왕이 없기 때문에 광개토대왕릉으로 본다고 하나 연구의 진척을 기다릴 문제다.

<국내성>
현재의 집안현성이다. 기원3년 유리왕이 이곳으로 천도했다. 성은 압록강에 면해 있으며 동쪽으로 두만강이 흐른다. 국내성의 평면은 거의 방형이며 둘레는 2·7m. 발굴결과 구축이 가장 잘된 부분은 고구려시대 축조한 부분이었다. 동벽과 북벽의 기단이 보존돼있고 서벽남쪽에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지금 국내성은 시가지의1∼2m 아래에 잠자고있다.
국내성 서북쪽 3km지점에 국내성의 수비성인 환도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단애와 산마루를 이용한 「난공불락」의 산성이다.

<고분유적>
집안일대의 고구려 고분은 대소 1만1천기였으나 도시화로 파괴, 7천기가 현존하고 있다. 이중 약1천기가 조사·정리됐다.
고분은 적석총과 토총으로 나뉘어지며 현재 발굴된 벽화고분은 약 20기. 그중 중요한 것은 각저총·두만십이호분·장천일호분·무용총· 삼실총·사신총·오도분4-5호등이다.

<박물관>
집안현 박물관을비롯, 길림성박물관·요녕성 박물관엔 고구려·발해유물이 대량 소장되어 있다.
집안현박물관엔 집안일대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데 그중 금동제띠(대)금구와 칠성산1196호분의 동정, 만보정78호분의 금동제마구와 황유도기등이 주요문화재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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