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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디자이너는 또 다른 의미의 고고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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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티에·마르지엘라의 후계자, LVMH그룹 ‘모이나’의 라메쉬 나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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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을 알아 새것으로 발전시킨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은 동서양에 모두 통하는 진리다. 특히 헤리티지(heritage·유산)에서 영감을 얻어 현대 취향에 맞는 제품을 내놓아야 하는 명품 브랜드로서는 꼭 필요한 덕목이다. 지난 8월 서울 신라호텔 로비에 국내 첫 매장을 낸 모이나(MOYNAT)는 명품업체의 온고지신 ‘강박’을 잘 보여준다. 한국인에겐 낯설지만 모이나는 167년 역사를 지닌 프랑스의 가방&트렁크 브랜드다. 하지만 설립 초기의 명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빛을 잃었고, 한동안 작은 공방 수준으로 겨우 유지될만큼 성장이 정체됐다. 반전의 계기는 ‘명품 대통령’으로 불리는 LVMH(루이 비통 모에 헤네시) 그룹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만들었다. 2011년 ‘최고급 명품을 만들겠다’며 모이나를 인수한 후 에르메스 출신의 인도 디자이너 라메쉬 나이르(Ramesh Nair·51)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해 부활 작업을 이끌고 있다. 먼지 쌓인 헤리티지 속에서 디자인 영감을 캐내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변화시키는 나이르, 그의 디자인 철학을 서울 매장에서 직접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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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처음 설립된 모이나는 영국 여행을 떠나는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1869년 파리 오페라 거리에 첫 부티크를 오픈했다. “도전과 유머를 즐긴다”는 디자이너 라메쉬 나이르(위 큰 사진)의 철학이 검정 티셔츠, 데님 팬츠 차림의 자유로운 모습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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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바닥이 오목하게 디자인돼서 무릎에 올렸을 때 안정감을 주는 인체공학적 디자인의 리무진 브리프 케이스.

-모이나는 오래된, 새 브랜드다. 헤리티지가 어떤 의미가 있나.

“2001년 에르메스에 입사했을 때 ‘아카이브부터 보라’고 하더라. 책·카탈로그·잡지를 비롯해 후크·버튼까지 상당한 양이 보관돼 있었다. 이 경험을 토대로 모이나에 합류하자마자 모이나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사모았고, 이걸 디자인 베이스로 삼았다. 브랜드 디자인이 나무라면 헤리티지는 DNA를 품은 뿌리다. 뿌리를 모르면 나무를 키울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디자이너는 또 다른 의미의 고고학자다.”

-구체적으로 헤리티지에서 어떻게 영감을 얻나.

“헤리티지 아이템의 디테일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난 작업할 때 늘 관찰, 상상, 그리고 비틀기(거꾸로 보기) 과정을 거친다. 트렁크 잠금장치를 예로 들어보자. 소재부터 못을 박은 위치까지 꼼꼼하게 관찰하며 ‘이건 왜 이렇게 생겼을까’ 상상했더니 ‘손가락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라는 결론이 났다. 이걸 거꾸로 다는 (비틀기) 디자인을 생각했고 제품에 적용했다. 다른 작업을 할 때도 비슷하게 비틀기를 한다. 왜 옷에서 팔을 위한 구멍은 두 개 밖에 없지, 소매가 네 개인 옷은 만들면 안 되나? 이건 왜 똑바로 세워야 하지, 거꾸로 놓으면 안 되나? 뭐 이런 식이다. ‘마들렌 클러치’를 처음 디자인할 때 다들 플랩(덮개 부분)이 너무 길다고 했다. 맞다. 비율이 특이하다. 하지만 만약 플랩이 중간쯤 있다면 이 백의 특별한 실루엣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평면 그림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죽 조각을 퍼즐처럼 맞춘 ‘마케트리’ 기법도 오래된 방식이라고 들었다.

“맞다. 17~18세기 이탈리아 로마·베니스에서 대리석이나 타일에 처음 활용했고, 프랑스 궁전에서는 나무 테이블에 사용했던 기법이다. 이걸 가죽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가죽 위에 프린트를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음새가 전혀 안 보이는 일종의 퍼즐조각이다. 이렇게 작은 조각을 작업하는 건 장인들에겐 악몽일 수 있다. 심지어 누군가 내게 ‘참 잔인하다’고 하더라.”

-보기엔 별 차이도 없는데 왜 이렇게 ‘잔인한 디테일’에 집착하나.

“발견하는 즐거움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 와있지만 (삼성전자가 아니라) 애플 디자인을 좋아한다. 애플의 조나산 아이브는 독일의 대표적 산업 디자이너인 디터 람스를 모방했다. 디터 람스의 디자인은 단순한 직선과 원으로만 이루어졌다. 단순하게 보이기까지 공들인 디자인의 그 미묘한 차이를 소비자가 발견했을 때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해본다. 디테일은 그만큼 중요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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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화백의 단색화.

-당신의 디자인 철학도 조나산 아이브나 디터 람스를 잇고 있나.

“글쎄, 그럴 수도 있겠다. 난 언제나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 작업을 할 때마다 마음 속으로 늘 ‘더 깔끔하게, 깔끔하게’ 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친다. 내가 끌리는 디자인 역시 그렇다. 미스 반 데어 로에(독일 건축가), 안도 다다오(일본 건축가), 마크 로스코(화가), 그리고 이우환의 팬이기도 하다. 더하는 건 쉽지만 빼기는 정말 어렵다.”

-인도 출신으로 유럽 무대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우환을 알게 된 특별한 계기라도?

“그가 유명한가? 그저 파리의 한 갤러리에서 작품을 처음 본 후 그의 팬이 됐다. 언젠가 꼭 만나보고 싶다.”

-인도 문화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나. 인도 사리의 형형색색 아름다운 색감인가.

“난 인도 남부 출신이다. 북인도에선 색을 많이 쓰지만 남인도에선 반대다. 그래도 나는 색감에 대한 DNA를 타고 난 것 같다. 50가지나 되는 색 이름을 단번에 맞힐 수 있다. 그리고 사리의 진짜 아름다움은 색이 아니라 단순함에 있다. 봉제선 없는 그냥 한 조각의 천을 펼치고 묶어 자신에 맞게 사용한다. 단순함을 좋아하는 건 여기서 받은 영향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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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디자이너 장 폴고티에(왼쪽)와 요지 야마모토.

-패션계의 전설 반열에 오른 요지 야마모토, 크리스찬 라크르와, 마틴 마르지엘라, 장 폴 고티에와 모두 작업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다. 2000년 막 파리에 도착해서 디자인 경력이 짧았을 때 요지 야먀모토 밑에서는 텍스타일(Textile·직물) 생산 파트를 담당했다. 크리스찬 라크르와는 처음으로 인턴 기회를 준 사람인데 내게 맞는 디자인은 아니었다. 모든 게 너무 과해서 힘들었다. 당시 에르메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마틴 마르지엘라와 일하는 걸 꿈 꿨다. 우연히 알게 된 에르메스 당시 회장 장 루이 뒤마를 통해 마르지엘라에게 내 작품을 보여줬고 결국 2001년 그의 팀(에르메스)에 합류할 수 있었다. 마르지엘라가 2003년 에르메스를 떠나면서 ‘내 후임은 다들 깜짝 놀랄 인물’이라고 귀띔했는데 바로 장 폴 고티에였다.”

-장 폴 고티에와 마틴 마르지엘라, 상당히 다른 디자이너인데.

“작품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개념적이고 놀라운 아이디어의 옷을 디자인하는 면은 닮았다. 재킷·트렌치코트·드레스 등 기본이 되는 옷을 살짝 비트는 방법도 비슷하다. 빈티지 옷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걸 좋아한다는 점에선 우리 셋 모두 닮았다. 또 컬러와 소재를 독특하게 다룬다는 점에서도 둘은 비슷하다. 하지만 고티에는 과하게, 마르지엘라는 절제하는 편이다.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마르지엘라 방법은 매우 쉬웠고(내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고티에의 방법은 매우 어려웠다. 또 고티에 밑에서는 하면 안 되는 게 뭔지를 배웠고, 마르지엘라에게선 안될 게 없다(Why not)는 걸 배웠다. 예를 들어 내가 아이디어를 들고 가면 고티에는 일단 ‘노’, 마르지엘라는 ‘와이 낫’이라고 반응한다.”

-마르지엘라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어릴 때 디자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피에르 가르뎅이나 이브 생 로랑 같은 이름을 모르고 자랐다는 얘기다. 인도 델리의 NIFT(National Institute of Fashion Technology)와 미국 뉴욕의 FIT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처음 서양 디자이너들을 알게 됐고 이후 레이 카와쿠보(꼼 데 가르송 디자이너)나 요지 야마모토 같은 일본 디자이너들에 매료됐다. 그들은 늘 ‘생각’이라는 걸 하더라. 마르지엘라에게서도 똑같은 점을 발견했다.”

-마르지엘라는 업계에서 비밀주의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인데.

“잘 생겼고 매우 키가 크다. 또 매우 지적이고 나이스하다. 그와 일한 건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 그가 에르메스를 떠날 때 스튜디오 전체가 울음바다가 됐다. 그런 디자이너는 평생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렵다.”

-장 폴 고티에는 괴팍한가 보다.

“그는 정말 쉽지 않다. 엄청 지적이지만 동시에 광적인 면도 만만치 않다. 쇼를 위해 피팅을 하는데 오전 9시에 시작해서 오후 4시까지 한 자리에 앉아서 계속 ‘다음, 다음, 다음’을 외치더라. 그리고 끊임없이 다음 아이디어를 얘기한다. ‘다음엔 이걸 하고, 그 다음엔 이걸 하고….’ 뇌가 24시간 풀가동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요지 야마모토의 인상은 어땠나.

“워낙 어릴 때 봐서인지 신과 같았다. 지나가는 것만 봐도 경외감을 느꼈다. 내 기억 속의 그는 말이 별로 없는 철학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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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덮개가 길게 내려와 삼각형의 옆면과 함께 독특한 실루엣을 만드는 마들렌 클러치. 가격 412만원.
②③ 보기엔 프린트된 그림 같지만 손으로 일일이 자르고 한 조각씩 조립해서 퍼즐 조각처럼 끼워 맞추는 ‘마케트리’ 기법의 클러치.

-다시 당신이 만든 핸드백 얘기를 해보자. 들어봤는데 무겁더라.

“벤틀리는 무겁고 도요타는 가볍다. 그런 차이다. 손잡이 하나도 가죽을 8~9겹 덧붙여 밀푀유(얇은 페이스트리를 겹겹이 쌓은 프랑스 과자)처럼 만든다. 장인들에겐 악몽처럼 힘겨운 과정이지만 그래서 퀄리티가 남다르다.”

-아무리 그래도 가죽 핸드백 하나에 500만원을 훌쩍 넘는 건 과하지 않나.

“아니 전혀. 오히려 난 싸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자동차와 비교해 보자. 폭스바겐 파사트와 아우디 A8 플랫폼은 같다. 그런데 왜 가격 차이가 날까. 품질에 대한 신뢰다. 마케팅 부서에선 ‘너무 비싸서 아무도 사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난 가죽 품질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모이나는 전 세계 가죽업체 중 상위 5곳의 가죽만 사용하고 각각의 제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명의 장인이 제작한다. 이런 방식은 에르메스와 똑같다.)

-아르노 회장이 당신에게 바라는 건 뭔가.

“우리는 매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목표가 같다. 고티에가 에르메스를 나간 후 다음 단계를 고민하면서 많이 답답했다. 에르메스와 고티에라는, 그 정상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최고가 아니면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모이나를 통해 구현하는 셈이다. 처음에는 아르노 회장도 ‘왜 이렇게 비싼 가죽을 써야 하느냐’고 물었지만 이젠 내 철학을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준다. 아르노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가 모이나일 정도로.”

-제작방식이나 디자인, 심지어 당신 경력까지 … 아르노 회장과 당신의 경쟁상대는 에르메스인가.

“아르노 회장은 비즈니스맨이고, 나는 아티스트다. 꼭 이겨야 할 경쟁 상대 같은 건 없다. 같은 가죽공방에서 가죽을 공급받는다고 해서 똑같은 결과물이 나오는 건 아니다. 간단한 오믈렛 하나 만들 때도 똑같은 계란을 갖고 누가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맛과 모양이 달라지지 않나. 난 오히려 곡선 하나를 디자인할 때도 에르메스와는 다르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사실 난 에르메스에선 가방이 아니라 의류를 디자인했다. 가방 디자인은 이번이 처음이고, (에르메스가 아닌) 모이나의 헤리티지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했다.”

-가방 디자인이 이번이 처음이라니, 엄청난 도박 아닌가.

“마르지엘라나 고티에와 함께 일할 때 패션쇼에 사용할 ‘이상한’ 가방은 꽤 많이 만들어봤다. 하하하. 투명한 악어백, 버켄 숄더 백, 섀도 버킨 백 등. 어차피 인생의 모든 일에는 위험이 따른다. 도전하는 길밖엔 답이 없다.”

글=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모이나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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