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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겉치레 인사말을 가장 싫어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이중섭화백을 만난 것은 1947년초 내나이 18세때, 내고장 원산에서 출간된 8·15해방기념시집『응향』이 크게 말썽이 된 직후였다. 그는 표지화 때문에 반동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였다.
이화백의 비좁은 아틀리에에는 엿장수나 고물상에서 뒤져낸듯한 골동품과 제작중인 그림 몇점이 널려있었다. 작은 책꽂이에는 시집도 몇권 있었는데 프랑스 사화집『빈곽수』를 여기서 처음 대했다. 그는 시도 그림 못지않게 좋아했던것 같다.
휜칠한 키에 얼굴은 갸름하고 창백했다. 콧수염을 약간 기르고 긴머리는 올백, 사물에 집착하는 눈이 빛나있었다. 작업모 같은 벙거지를 쓰고 이상한 조끼를 걸치고 다녔는데 손에는 큼직한 파이프가 들려있었다. 이런 물건들은 그가 손수 지어만든 것 들이라했다.
이화백은 말수가 적었고 퍽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와 생활을 같이해보지 않고서는 그의 의사를 제대로 파악할 길이 없었다. 말머리만 꺼내놓고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기 일쑤였다. 말로하는 의사표현은 불확실한데 붓으론 확실한 것만 그렸다. 어딘가 일상범사와 문명사회를 등진데가 있어 보였다. 시류에 휩쓸리려 들지않아 북한천지에서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럴 때 그는 곧잘「맥난다」는 소리를 했다. 실의와 좌절의 표현이었다.
하루는 평양을 다녀와서「맥난다」고 했다. 다른 사연도 있었겠지만 갓 월북해온 시인 오장환을 만났더니 어제의 장환이가 아니라 하더라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수있느냐며 쓰디 쓴 읏음을 지였다.
이화백의 아틀리에에 찾아들면 좀처럼 물러나기 어려웠다. 그는 만사 제쳐놓고 술판부터 벌였다. 낮이고 밤이고 아랑곳하지 않았다. 친구가 좋아 놓치기 싫어했다. 그가 제일 싫어한 것은 인사의 말씀이었다. 진실이 결여된 사교적인 언사나 겉치레의 말이 싫었던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적당히 만나고 돌아서는 것도 인사치레라 못마땅해 했다.
고향에서는 1년쯤 이화백을 가까이 했을 뿐, 그를 남에서 다시 상봉하기는 누상동 가우에서의 일이다. 7년만의 재회였다. 늦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가 머무르고 있는 2층 다다미 방은 스산했다. 가구도 침구도 없이 슬리핑백 하나로 뒹굴며 견디고 있었다. 웅크려 사는 생활인데도 호박덩이 하나 크게 그려놓고『얼마나 편한 자세냐』며 웃음을 잃지않았다.
당시 나는 종군중이었는데 외출나올때 양담배 은종이를 모아가지고 李화백을 찾았다. 그가 원했기 때문이다. 캔버스나 물감을 살 돈이 없어 표현이 가능한 스페이스를 찾다보니 은종이에 착안했는지 모른다. 그는 시인을 부러워했다. 손바닥만한 종이조각만 있으면 언제 어느때 어느곳에서나 쓸수있는 것이 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러하다. 시상만 잡히면 어디엔들 못쓰겠는가. 그래서 이화백은 시를 쓰듯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따분해서 그렸고 배고파서 그렸고 처자가 그리워서 그렸다. 은종이는 물론 깡술 마시다말고 땟국 낀 강판지에다 그렸고 책뚜껑에도 그렸고 시험지에도 그렸다.
오늘날 세상에서는 이화백을 가리켜 천절한 귀재니 천재니 하지만 실상 그는「피카소」나 「마티스」처럼 오래살아 대작을 남기고 싶어했다. 『먹을 것만 준다면 저택이나 사원같은데 천장이며 벽에다 온통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내게 속삭인 일이 있다. 김광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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