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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경주 지진과 북핵 위기가 요구하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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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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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논설주간

관측 이래 최대인 규모 5.8의 경주 강진 소식을 유럽의 서쪽 끝 포르투갈 리스본을 막 떠난 뒤인 12일 접했다. 400회가 넘는 여진이 수도권까지 구석구석을 핥고 지나가는 동안 정부는 무력했다. 오죽하면 피해 현장을 둘러본 집권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정부와 공공기관들의 무능과 무책임은 세월호와 구의역 사고 이후 조금도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고 비판했을까.

리스본은 대지진의 충격을 완벽하게 극복한 도시다. 규모 9.0의 가공할 강진이 발생한 것은 1755년 11월 1일, 하필이면 성인들을 기리는 만성절이었다. 경건한 금욕의 도시가 한순간에 약탈과 방화로 얼룩진 난장판이 돼 버렸다.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으로 희생양을 만들기에 딱 알맞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국왕이 총리 카르발류에게 대처방법을 묻자 “죽은 자는 묻고, 산 자는 치료해야 합니다”라고 명쾌하게 답했다. 그에게 사태 수습의 전권이 주어졌다.

카르발류는 종교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시신을 화장해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고, 생존자들에게 차별 없이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진 피해에 관한 과학적 설문조사를 실시해 근대적 재난관리와 국제 재난구호시스템을 만들었다. 지진에 대비한 신공법을 의무화하고 귀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4층 이상 건물을 짓지 못하게 했다. 합리와 과학을 무기로 교회 권력을 압도한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의 빛나는 승리였다.

같은 시대의 철학자 볼테르의 유명한 철학적 콩트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주인공 캉디드는 리스본 대지진의 참상을 두고 “이게 바로 이 세상 최후의 날이야”라고 한탄한다. 지진이 리스본의 4분의 3을 파괴한 시점에서 현자(賢者)들은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몇 사람을 골라 약한 불에 천천히 태워 죽이는 장엄한 의식을 군중에게 보여준다. 종교의 편협성과 광신의 폭력성에 대한 볼테르의 조롱 섞인 일격이다. 캉디드는 마침내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가꾸어야 한다”고 결론 짓는다. 당시 유행하던 라이프니츠류의 낙관주의인 “현 세계가 최선의 세계”라는 주장에 대해 “능동적인 실천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논리로 반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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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와 메르스 사태에 무기력했던 정부는 경주 지진에서도 속수무책이었다. 국민안전처는 재해 상황을 알리는 문자메시지조차 제때 보내지 못했고, 홈페이지는 다운됐다. 활성단층 부근인 인근 월성 1~4호기를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은 무려 4시간12분 만에 가동 중단을 결정했다. 경주에서는 신라시대에 100여 명이 사망하는 지진이 발생했고 고려 초기에는 석가탑이 두 번 무너졌다.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다. 지진의 90%가 발생하고 있는 활성단층의 지도를 만드는 일에 지체 없이 착수하고 내진 기준을 새로 정해야 할 것이다.

합리와 과학으로 리스본 대지진을 극복한 유럽인은 계몽주의의 깃발을 들고 프랑스대혁명을 쟁취해 시민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그래서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의 생명력도 끈질기다. 뉴욕 필하모니의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 소설을 오페레타 ‘캉디드’로 작곡했다. 로린 마젤이 지휘자로 이끈 뉴욕필은 2008년 평양 공연에서 두 번째 앙코르 곡으로 지휘 없이 연주했다. 매카시즘의 피해자였던 번스타인의 작품을 선곡(選曲)한 것은 공산국가인 북한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지만 볼테르의 원작에 능동적 실천의 가치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떤 위기와 충격에도 반응하지 못하는 한반도의 양쪽 당사자들에 대한 무언의 비판이야말로 숨은 의도가 아니었을까.

평양 공연 이후 북한이 다섯 번째 핵실험을 강행한 위험천만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지만 한국은 이렇다 할 돌파구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주 미국외교협회의 대북정책 공동위원장인 샘 넌 전 상원 군사위원장과 마이클 멀린 전 합참의장의 대담한 제안이 나왔다. 두 사람은 워싱턴 포스트 공동기고에서 미국의 차기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협력에 대해서는 더 큰 혜택을, 계속되는 도전에는 더 큰 비용을 내걸어 북한이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고 북한이 실질적인 대화에 응하도록 새롭고 진정한 유인책을 제공해야 한다고도 했다. 실질적 대화에는 남북한과 미국이 중국의 지원을 받아 북한의 완전한 핵 군축 및 인권의 진전과 교환해서 한국전쟁을 최종적으로 끝내고 점진적으로 관계를 정상화하는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포괄적 거래의 가능성이 포함된다고 했다.

유럽인들은 능동적 실천으로 리스본 대지진의 충격을 극복했다. 북한의 위험천만한 핵 도박으로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 있고, 안전에 대한 확신을 잃고 분열의 위기에 선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이제 우리도 밭을 갈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하경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