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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문학은 분단비극 넘어선 승리의 행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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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지난 여름 한창 무더위에 시달릴 무렵 이시영 시인으로부터 선생님의 위중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다니요. 가슴이 떨리는 가운데도, 선생님과 함께했던 50여 년의 세월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1963년이었던가, 정초에 소설가 김승옥을 따라 황순원 선생댁에 세배를 갔다가 많은 선배문인들 틈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지요. 그때 선생님은 겨우 서른을 갓 넘긴 청년에 불과했지만, 이미 문제작 ‘판문점’과 ‘닳아지는 살들’의 발표로 현대문학상 신인상과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쟁쟁한 신진작가의 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조금도 유명인사 행세를 하지 않고 저 같은 후배들과 기탄없이 어울렸습니다. 그때부터 수십 년, 얼마나 많은 술잔과 말잔치와 등산의 나날들이 선생님과의 사이에 기억의 지층을 만들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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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창작과비평’ 10주년을 기념해 1976년 봄호에 실린 좌담회에 참석한 생전의 이호철씨(오른쪽 두 번째). 왼쪽부터 평론가 염무웅·시인 신동문(작고)·평론가 백낙청씨. 맨 오른쪽은 시인 신경림씨. [중앙포토]

1971년 봄이었습니다. 출판사 한 귀퉁이를 빌어 ‘창작과비평’ 명맥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을 무렵이었지요. 창간 때부터 적잖이 힘을 보태셨다던 선생님은 그 무렵에도 자주 들렀습니다. 신경림·한남철·조태일·방영웅·황석영 등 벗들이 패잔병처럼 죽치고 있을 때 선생님의 등장은 그 자체가 큰 격려였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심상찮은 표정으로 오셨지요. 천관우 선생 등이 주도하던 ‘민주수호국민선언’ 서명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까지 힘차게 이어져 오는 문인들의 민주주의운동은 돌이켜보면 그때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1970년대 악명 높은 유신시절 선생님은 늘 후배들 앞장에 섰습니다. 1974년 1월 7일의 ‘개헌청원 지지선언’이 대표적인 사건이었지요. 그 때문에 선생님은 터무니없게도 ‘문인간첩단’의 수괴가 되어 모진 고생을 하셨습니다.

평론가 염무웅 ‘이호철 선생 영전에’

하지만 선생님은 산에 올라 북녘 하늘을 바라볼 때건 감옥에 갇혀 집필의 자유를 빼앗겼을 때건 한시도 문학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고향 원산에서 중학에 다닐 무렵부터 러시아 작가 체호프의 열렬한 독자였다고 선생님은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으로서 겪은 불행이 작가의 문학적 자산으로 승화된다는 것은 비극적 역설이라 할 터이지만, 선생님은 러시아 문학의 진수를 졸업하기도 전에 소년병으로 소집되어 전투에 참가하고 포로가 되고 마침내 단신 월남했습니다. 피난지 부산에서 부두노동자, 제면소 직공, 미군부대 경비원 같은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쓰셨다지요. 데뷔작 ‘탈향’이나 장편소설 『소시민』에 그려진 주인공들의 팍팍한 삶의 정경을 통해 우리는 이호철 문학의 위대한 저력을 실감합니다. 한 개인이 경험한 삶은 비록 고통에 가득 찬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섬세하고 충실하게 그려낸 문학은 만인에게 고통의 극복을 선사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의 문학인생 60년은 분단비극에 대한 승리의 행진이었습니다. 언젠가 이루어질 통일의 그날, 선생님의 문학혼은 힘차게 다시 귀환할 것입니다. 그날까지 모든 짐 내려놓고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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