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제를 왜 하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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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여당의 지자제실시 방안이 확정되어 공청회에 부쳐지는 단계가 되었다. 지자제가 주민들의 행정 참여폭을 늘리고 민주시민의 훈련장으로서 의미가 크다는 이상론에 비추어 보면 정부·여당의 시안은 아직 손질을 해야할 곳이 적지 않다.
다만 국민들의 오랜 숙원인 지자제가 중단된 지 실로 26년만에 비록 전면적인 것은 아니지만 재 실시를 위한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물론 정부·여당이 11대 국회 때의 여야합의와 총선 때의 공약에 따라 실시 방침을 굳혔다고는 해도 야당과의 견해나 이해상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며, 특히 개헌 협상과의 연관에서 어떤 변수가 생길 것인지 등 적잖은 문제점들이 도사리고 있다.
벌써부터 내년 상반기부터 실시한다는 당초 예정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다는 전망들이 나오는 까닭도 그런데 있다.
무엇보다 현재의 개헌협상의 진척이 지자제 논의의 순탄한 타결의 결정적 요인이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합의개헌이 기대한대로 성취될 경우 지자제 문제는 그 전망이 뚜렷해지겠지만, 합의개헌에 실패해서 정국이 혼미에 빠진다면 지자제 역시 좌초할 가능성이 높다.
뿐더러 개헌협상의 향방에 따라지자제의 내용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부·여당의 안은 대통령중심제인 현재의 권력구조를 전제로 짜여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령 자치단체의 장을 임명제로 하고 지방의회에 불신임권을 주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은 논란거리가 된다. 자치단체의 수장은 선거로 뽑는 것이 원칙이고 그게 지자제실시의 취지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행정독주를 견제하고 주민의 자발적인 의사를 행정에 반영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지방의회를 집행기관의 자문기관쯤으로 전락시키면 그 기능을 다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다.
더욱이 민정당의 당론이 내각책임제로 굳어진 현 시점에서 자치단체장의 임명제와 권력 분산론과의 논리상 상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도 주목거리다.
정부·여당의 방안은 물론 최초의 안일뿐 실시를 전제로 한 최종적인 안은 아니다. 앞으로 공청회와 야당과의 절충 등을 통해 다듬어질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정부·여당의 방안이 이상과 현실사이의 괴리를 상당히 고러했다고는 본다. 그러나 자치단체장의 선거시기를 「지방의회의 운영이 정착되는 단계」라는 말로 얼버무리기보다는 실시 시기를 분명히 못박는 것이 보다 핵심에 접근하는 자세라고 믿는다.
지자제가 비록 개헌협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현실을 감안한다해도 정치인들이 느끼는 부차적인 중요성 때문에 이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국민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민주화에 있지 개헌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가 목적이라면 개헌은 그 수단이라는 말도 성립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지자제는 민주화의 핵심적 영역에 속하는 문제다. 아무리 헌법이 민주적으로 만들어진다 해도 국민의 의식수준이 민주화되지 못하고 뒤떨어진 것이라면 「민주적인 헌법」은 유명무실해지기 쉽다.
그런 뜻에서 지자제는 개헌 못지 않게, 아니 보다 더 중요한 우리의 초미의 과제라고 해야 옳다.
개헌도 촉박하지만 지자제를 실시하는 시간도 아주 촉박하다. 합의개헌이 안되면 지자제도 그만이라는 안이한 자세로 임한다면 그것은 정국을 안정시키고 민주화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외면하는 일이다.
따라서 여야는 개헌 못지 않은 성의를 갖고 지자제에 관한 협상과 토론에 임해야한다. 졸속을 피하면서 국민 여론을 최대한 수렴하는 방안이 하루 속히 확정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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