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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 입김에 ‘학생부’ 손대는 학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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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경기도 안양시의 사립고 교감 A씨는 최근 대입 수시모집 원서 접수를 앞두고 학교를 찾아온 고3 학부모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학부모는 아이의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기록을 문제 삼았다. “학업에 대한 집중력은 부족하지만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에 열의를 보인다”는 문구를 고쳐 달라고 요구했다. A씨는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로 나와 ‘집중력 부족’ 부분은 빼 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수시 32%가 학생부종합전형
학부모들 “고쳐달라” “빼달라”
학교는 명문대 합격 늘리려
과장·각색, 심하면 조작까지

이런 일은 서울의 한 자율형사립고 교장도 겪었다. 그는 “학부모가 근거를 들고 와 ‘이렇게 써 주세요’ 하면 이런 요구를 무시할 교사가 있겠느냐”며 “조작까지는 아니지만 과장 내지 각색을 하면서 자괴감을 느끼는 교사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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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 수시모집 전형의 핵심 자료인 학생부가 과장 또는 각색, 심지어 조작의 타깃이 되고 있다.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 전체 수시모집 인원의 32.1%(2018학년도)를 차지하는 등 갈수록 중요해진 데 따른 현상이다. 서울대는 신입생 정원의 78.5%, 고려대는 61.5%에 이른다.

경찰이 지난 7일 광주광역시 모 사립여고에서 적발한 성적 조작 역시 교장의 지시에 따라 일부 교사가 학생부 기재 내용을 학생들에게 유리하게 고친 게 골자다. 2011년엔 서울의 사립 B고에서 학생부 내용을 고치다 적발된 적이 있으며, 지난해 5월 충북의 한 학교에선 담임이 3년간 20번 결석한 학생의 학생부에 ‘3년 개근상’이라고 적어 감사에 적발된 적도 있다.

학생부 기재 항목 중 교과 학습 발달상황에 적는 ‘세부 능력과 특기사항(세특)’이 논란이다. 세특은 수업에 임하는 학생에 대해 교사의 주관적 판단을 적는 항목이다. 안연근 잠실여고 교사는 “학종에선 지원 학생의 전공 적합성이 굉장히 중요하다”며 “독서나 수상 실적 등 객관적인 부분을 빼면 ‘세특’이 전공 적합성을 나타내는 주요 항목”이라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교장은 서울대 합격생 수를 늘리기 위해, 교사는 학생의 입시에 유리하게 내용을 적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사교육업체도 동원되고 있다. 교육 업체인 스터디홀릭 강명규 대표는 “연간 300만~400만원을 주면 학부모와 함께 기재 내용을 살펴보며 1년 내내 컨설팅해 주는 곳도 많다”며 “문구까지 써 줘 학교에 얘기하라고 시키고, 학교는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의 한 고교 교장은 “학생부가 아니라 소설책으로 뽑는 학종은 정의롭지 못한 전형”이라고 비판했다. 본지가 종로학원하늘교육과 함께 학생·학부모 1135명을 설문 한 결과 학생의 41.4%, 학부모의 58.4%가 학종에 대해 “공정하지 않다”고 응답했다.

공립과 사립, 일반학교와 자립형사립고 등 학교마다 기재 내용이 천차만별인데도 대학은 이를 활용한다. 서울 성동구 한 공립고의 김모(17)양은 “공부 잘하는 몇 명 외엔 학생부 내용이 전부 똑같고 분량도 두 줄밖에 안 된다”며 “특목고에선 없던 대회도 만들어 준다는데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고 말했다.

김혜남 문일고 교사는 “대학이 평가 기준을 구체적으로 공개해야 하고 수시 논술 전형·정시 등 다른 전형과도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오세목 서울자사고교장협의회장은 “지금처럼 가다간 학종 자체가 존재의 심각한 도전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진호·전민희 기자 yes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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