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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닝 차림 조폭, 배반하는 보스…모두 내가 살던 동네 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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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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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부산 조폭들의 세계를 그린 『뜨거운 피』를 낸 소설가 김언수씨. “부산 조폭은 검은 양복보다 추리닝 차림이 많았다”고 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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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596쪽, 200자 원고지로 2400쪽이나 되는 분량인데도 부담스럽지 않다. 소설 속 부산 조폭 세계의 생리가 워낙 실감 나는데다 눈꼽만큼의 불편도 주지 않겠다는 듯 문장이 빠르게 읽혀서다. 15년차 작가 김언수(44)씨의 두툼한 장편 『뜨거운 피』(문학동네) 얘기다.

새 장편 『뜨거운 피』낸 김언수
첫사랑 못잊는 중간보스 삶 통해
윤리보다 생존, 인생의 진실 녹여

소설은 피와 살이 튀는 단순 누아르가 아니다. 마치 한국사회의 축소판처럼 읽힌다. 노태우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벌인 직후인 1993년, ‘구암(狗巖)’이라는 이름의 가상의 바닷가. 후유증을 앓는 조폭 세력들 간에 밀수 루트 주도권을 둘러싼 전면전이 벌어진다. 정작 싸움에서 죽어 나가는 건 잔챙이 조폭들이다. 폭력의 정점에 선 조직 보스들은 장기판 말 부리듯 크고 작은 싸움의 희생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를 두고 타협과 배반을 되풀이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한다. 이들이 다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김씨는 나이가 마흔이 되도록 창녀가 된 동갑내기 첫사랑 인숙을 잊지 못하는 ‘달달한’ 조폭 희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사랑이라고 풋풋하게 말하기에는 ‘짠한’ 둘의 인연, 희수가 경험하는 폭력 활극 안에 명분과 윤리보다 생존이 우선시되는 인생의 착잡한 진실, 싸구려 신파가 더 큰 공감을 사는 세상의 이치를 녹였다.

김씨는 정유정·천명관보다 덜 알려졌을 뿐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로 승부해 왔다. 말 그대로 암살을 설계하는 사람들을 그린 그의 2010년 장편 『설계자들』은 프랑스어로 번역돼 최근 프랑스추리문학대상 후보에 올랐다. 수상하면 ‘한강 쾌거’ 비슷할 거라는 얘기가 나돈다. 판타지 요소가 강한 2006년 소설 『캐비닛』은 5만 부가 팔렸다.

소설 출간에 맞춰 진해에서 올라온 김씨를 5일 만났다. 조폭 얘기가 실감 난다고 했더니 “내가 살던 동네 얘기다. 조폭 세계로 진출한 친구들도 있다”고 했다.

도대체 어떤 동네에 살았길래.
“지금은 감천문화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 벽이 워낙 얇아 20가구쯤 사는 동네 어디서 누가 떠드는지 다 들리는 곳이었다. 쌍욕 하며 여자 때리다 잠시 후 ‘사랑해∼’ 하며 덮치는 소리까지 들렸다. 부산에서 제일 가난한 동네였고, 물러설 곳이 없어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이북 출신 조폭들이 정착한 동네였다. 자연스럽게 깡패 공급지였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하고 도둑질 많이 했다. 쓰레기 같은 동네를 떠나는 방법은 그 길 뿐이라며 악착 같이 공부해 서울대 간 학생들도 의외로 많았다.”

김씨는 사고뭉치들이 모였지만 문예반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문학에 눈떴다. 학교는 문예반 학생들을 전폭적으로 밀어준다며 야간 자율학습에서 제외시켜줬고 문예반 교실에서 담배를 피워도 눈감아줬다고 한다. 처음에는 시인을 지망해 이성복을 사랑하게 됐고, 시인 박재삼의 특강을 들으러 다니기도 했다.

문학성보다 이야기를 중시하는 것 같다.
“마흔 넘어가면서 지상에 발톱 박은 이야기에 끌린다. 한 번은 고향 동네 할머니에게 ‘건강하시죠’ 물었더니 ‘아유, 농약 먹고는 살아도 나이 먹고는 못 살아’ 하시더라. 그런 발언처럼 세상 사는 즐거움과 깊이를 담아야 진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문장이 잘 읽힌다.
“한국문단은 문장을 워낙 강조한다. 문장주의다. 나도 한 때 거기 빠졌었다. 내 별명이 문장에 관한 한 우완정통인데 그게 문학의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야기 없이 문장만 다듬고 있어 뭐하겠나. 스승 조해일 선생이 한국소설 읽지 말라고 하셨다. 이야기의 세계로 넘어오라는 말씀이셨다.”

김씨는 박진감 넘치는 소설 전개 방식 만큼이나 문학 소신을 밝히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가령 “한국문단 전체가 문학 자체를 관습적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잘 읽히는 문장을 쓰려면 풍경을 정확히 보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데 대학에서는 훌륭한 선생님들의 작품 필사만 가르친다고 했다. 골방에 틀어 박힌 작가들은 실은 아무 것도 모르는 관광객 비슷한 수준이면서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쓰려고 한다.

그런 현실을 개선할 방법은.
“한국문학은 내면에만 빠져 있다. 충무로적 사건을 소설에 집어넣어야 한다. 영화는 반대다. 내면이 없다. 인물들이 쓰나미 몰려오면 뛰어다니기만 한다. 문장을 다듬어 영화 속 인물들의 내면을 만들어줘야 한다.”
『뜨거운 피』는 얼마나 팔릴 것 같나.
“소설 낼 때마다 느낌은 항상 100만 부인데 잘 안 되더라. 지역에서 사는데 돈 많이 안 든다. 아내와 나 두 식구 250만원이면 만날 감성돔 먹고 황제처럼 산다.”

글=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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