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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상 받은 영양쌈밥, 불지 않는 국수…일등석엔 셰프가 탑승해 요리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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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해외 여행은 기내식을 맛보며 시작된다. 정신 없이 출국 수속을 밟고 복잡한 면세점을 지날 땐 실감하지 못한 여행의 맛을 음미하는 순간이다. 항공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통상 5시간에 한 번씩 나오는 기내식은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준다. 반면 불쾌한 경험은 해당 항공사를 싫어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지난해 8월 발표된 논문 ‘홉스테드의 문화 차원(이론)과 항공기내식 서비스’(한수연·김유경)에 따르면 “기내식 서비스의 질은 고객 만족의 가장 큰 요인으로 항공사 이미지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다양한 메뉴 고급화하는 기내식

인스타그램 등 각종 소셜미디어에 경쟁적으로 기내식 사진이 올라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항공사들이 그 어느 때보다 기내식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최근엔 저가 항공사와의 차별화를 위해 메뉴 고급화가 더욱 본격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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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대표 기내식인 비빔밥 메뉴와 양식 스테이크. 비빔밥을 선택하는 승객이 60% 정도다. 아시아나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라쿠치나와 함께 양식 메뉴 개발을 지속하고 있다. [사진 각 항공사]

대한항공은 자사와 외국 항공사 40곳의 식사를 공급하는 기내식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1969년 국제선에 취항하면서 샌드위치와 음료를 제공한 것을 시작으로 75년부터 국내에서 출발하는 외국 항공사에 기내식을 공급해 온 풍부한 노하우를 자랑한다. 김포공항과 인천공항에 첨단 기내식 센터를 운영 중이다.

김포센터는 일반석의 더운 음식(핫밀)과 제빵류를, 인천센터에서는 비즈니스석과 일등석 기내식과 특별식(병원식·채식·종교식·아동식), 찬 음식(콜드밀), 후식을 생산한다. 기내식 센터에서 조리된 음식은 미리 결정된 무게와 모양에 맞춰 포장해 블래스트 칠러(Blast Chiller)에서 영상 4~5도 이하로 급속 냉장한다. 미생물 번식을 막기 위해서다. 포장을 마치면 특수 차량으로 비행기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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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나항공 일등석에서 제공되는 궁중쇠갈비 쌈상 [사진 각 항공사]

아시아나항공은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의 자회사이자 세계 최대 기내식 공급 업체인 ‘LSG 스카이 셰프’의 한국 지사에 위탁해 기내식을 만들고 있다. 대신 메뉴 개발은 자체적으로 한다. 국내 기내식 시장은 대한항공과 LSG가 양분하고 있다. 세계 모든 항공사는 취항하는 지역의 현지 기내식 업체 공장에서 먹거리를 조달한다. 이 때문에 항공사 기내식 사업부 직원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취항지 케이터링 시설을 방문해 위생 상태와 요구대로 기내식이 만들어지는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기내식이 제공되기 시작한 것은 비행기에 특수 오븐이 탑재된 이후부터다. 이전엔 차갑게 먹을 수 있는 요리만을 제공했다. 국제기내식협회(IFCA)에 따르면 기내식의 역사는 1914년 제플린에어십이 승객들에게 샴페인을 제공한 것이 시초다. 정규 기내식을 제공한 것은 1919년 파리~런던 노선을 운항하던 핸들리 페이지 트랜스포트 항공이 처음이다. 2시간 비행에 크림티와 여흥이 제공됐다고 전해진다. 탑승 가능한 정원은 단 4명. 당시엔 우편 배달이 주된 목적이라 식사나 승객 안전에는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같은 해 10월 설립된 세계 첫 민항기인 네덜란드 항공(KLM)은 지상에서 준비한 포장 기내식을 나눠줬다. 1920년대 항공 업계에 뛰어든 영국 임페리얼에어웨이는 국제선에서 샌드위치와 홍차·커피를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내에서 음식을 나눠주는 승무원은 14세짜리 소년들이었다. 이들은 기체 부담을 덜기 위해 몸무게를 40㎏ 이하로 유지하지 않으면 벌금을 냈고, 선원용 재킷과 달라붙는 바지를 착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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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40년대 ‘하늘을 나는 호텔’로 불린 수상여객기 보잉 314 기종에 마련된 식당칸의 저녁 식사 풍경. 수상여객기는 활주로 없이 바다 위에 착륙했다. [사진 각 항공사]

메뉴까지 상세하게 기록된 첫 기내식은 에어유니언 항공이 1927년 7월 30일 서비스한 식사다. 메뉴는 오르되브르(전채), 랍스터 샐러드, 찬 닭고기와 햄, 니스 샐러드, 아이스크림과 과일이었다. 샴페인과 와인·커피도 함께 나왔다. 이 서비스도 1년이 안 돼 중단됐다. 음식을 서비스하기 힘든 여객기 구조 때문이었다. 미국 팬아메리칸항공(팬암 ·1991년 파산)은 1928년 플로리다~쿠바 아바나 노선에 식당칸을 설치하고 레스토랑처럼 꾸몄다. 식탁에 꽃병과 은식기를 놓고 제복 입은 직원이 음식을 서빙했다. 웨스턴에어라인(현 델타항공)은 지상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기내식 서비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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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델타항공 DC-3 기종에서 스튜어디스가 음료수를 종이컵에 따르고 있다. DC-3은 갤리가 처음 설치된 기종. [사진 각 항공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제트엔진을 장착한 대형 항공기가 개발되면서 한꺼번에 많은 승객을 먼 거리까지 수송할 수 있게 됐다. 비용 문제로 기내식이 간소화된 70년대 이전까지 기내식 서비스는 호화로웠다. 좌석 등급에 따른 메뉴 차별도 없었다. 58년 팬암이 보잉 707로 뉴욕(미국)~파리(프랑스) 노선을 첫 운항하면서 승객 111명을 태우며 처음으로 메뉴를 고를 수 있는 기내식이 등장했다. 보잉 747이 대표 기종으로 자리 잡은 70년 1월 미국 뉴욕 존F케네디 공항에서 영국 런던 히스로 공항까지 논스톱 비행편이 편성되면서 지상에서 준비한 음식을 갤리(항공기 안 부엌 겸 찬장)에 넣어 승무원들이 자리로 가져다 주는 방식의 서비스가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 기내식도 초기엔 대량생산이 쉽고 외국인 승객이 선호하는 양식 메뉴였다. 기내식에 김치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후발 주자인 아시아나항공의 ‘도발’이었다. 이전엔 “김치 냄새가 외국인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며 시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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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브리티시 에어 일등석 기내서비스. [사진 각 항공사]

하지만 김치가 나오자 느끼한 식사에 지친 여행자들은 환호했다. 대한항공의 최고 인기 메뉴인 비빔밥이 일반석으로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은 90년대 중반 즉석밥이 개발되면서다. 이전에는 보온밥통이 설치된 비즈니스석과 일등석에서만 제공됐다. 비빔밥이 97년 ‘기내식계의 오스카상’인 머큐리상을 받자 업계엔 한식 바람이 일었다. 비슷한 시기 비빔밥을 개발하고도 한발 늦은 아시아나항공은 고심 끝에 대항 메뉴로 영양쌈밥을 선보였다. 이 메뉴도 머큐리상을 받으면서 두 항공사의 자존심을 건 메뉴 경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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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SAS 항공 기내식. [사진 각 항공사]

기내의 공간적·물리적 제약은 기내식 개발팀을 괴롭히는 요소다. 2010년부터 아시아나항공에서 메뉴 개발을 하고 있는 이재길(프랑스 요리 셰프)과장은 “좁은 기내라는 공간적 제약에, 까다로운 위생 조건을 맞춰야 하고, 재가열했을 때 같은 맛을 유지하는 일이 정말 어렵다”고 말했다. 이 과장이 최근 유행하는 조리법인 수비드(sous-vid·진공포장된 상태의 재료를 저온으로 익히는 조리법)를 기내식에 적용하는 데는 1년 반이 걸렸다. 천천히 익힌 닭가슴살의 온도를 규정에 따라 떨어뜨렸다 데우면 촉촉하고 부드러운 수비드의 장점이 사라진다. 이 과장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중간에 한번 그릴에 굽는 것으로 해결했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비빔밥을 이을 메뉴로 2012년부터 저열량(450㎉) 비빔국수를 내고 있다. 역시 오랜 연구 끝에 9단계 숙성 기법으로 불지 않는 기내식용 면이 나왔다. 최근엔 일부 노선 일등석에서 셰프가 직접 탑승해 비행기 안에서 요리해 주거나(아시아나항공·스위스항공 등), 소믈리에가 동행해 와인을 골라 주는 경우(대한항공 등)까지 나왔다. 국내 양대 항공사는 기내식닷컴(www.kinaishoku.com)과 같은 해외 사이트에서 싱가포르항공·에어프랑스와 함께 기내식이 맛있는 항공사의 상위권을 다툰다.

[S BOX] 지상 음식보다 염도·당도 높게, 열량은 적게…와인도 진한 향으로

기내식 생산엔 식품공학 기술이 총동원된다. 먼저 최대 12시간 보관했다 먹어도 갓 요리한 것 같아야 한다. 게다가 수백 명이 한꺼번에 먹기 때문에 작은 위생상의 문제도 대형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조리 후 급속으로 영상 4~5도까지 온도를 낮춰 미생물 번식을 막고 맛을 잡는다. 조리 시설에선 병원 수술실 같은 위생 수칙을 지킨다. 특수 오븐으로 재가열할 땐 습도를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180도 이상에서 최적의 맛과 형태를 유지한다.

이렇게 개발해도 대량 생산했을 때 맛이 미묘하게 변해 사장되는 메뉴도 수두룩하다. 지상에서 맛있어도 비행기에선 다를 수 있다. 환경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비행기 내에선 기압이 낮아 컨디션이 떨어지고 계속 들려오는 엔진 소음도 식사를 방해한다. 이 때문에 기내식의 간은 일반적으로 지상의 음식보다 강하다. 염도와 당도를 조금 높이면 3만 피트 상공에서의 최적의 맛이 나오기도 한다. 수위는 항공사마다 다르다. 짜거나 싱겁다고 느끼는 정도가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기내에선 후각 기능도 떨어져 강한 향도 자주 사용된다. 기내에선 와인도 향이 세고 맛이 풍성한 제품이 준비된다.

열량도 중요한 조건이다. 장시간 앉아 있어야 해 소화불량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기내식에선 탄수화물을 최대한 줄이고 단백질 비중을 넉넉하게 잡는다. 기내식이 적어 보여도 먹으면 배부른 이유다. 지상에서 한 끼에 제공되는 밥의 정량은 180g이지만 하늘에선 120~140g이 적당하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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