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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신민당 고문에게 듣는다|"합의 개헌해야 정치 보복 없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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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인터뷰=전육 정치부 차장
3km의 아침 조깅을 동네 사람 20여명과 어울려 하고 상도동 자택의 대문을 들어서는 김영삼 신민당 고분(58)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 몇해 사이 흰 머리칼은 눈에 띄게 늘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팽팽한 동안이다. 「『머리는 남에게 빌 수 있지만 건강은 자기만이 지킬 수 있다』며 땀을 닦는 김 고문에게 쉴 틈 없이 질문을 시작했다.
-전두환 대통령과 이민우 총재의 회담은 잘된 것으로 보십니까.
『그만하면 긍정적으로 봐야죠. 한꺼번에 전부가 해결되는 법이 있나요. 우선 2시간 회담에서 이 총재가 1시간 이상을 얘기했다니 야쪽의 할 말은 다 한 것 아니겠읍니까. 단 두 사람이 만난 것 자체가 큰 변화이고 개헌은「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는 것과 국회에 위임 한 것 등이 모두 진전입니다.』 -김 고문이 김대중씨와 헌특 참여를 먼저 결정함으로써 타협의 물꼬가 틔었다고도 볼 수 있지 않겠읍니까.
『나의 헌특 참여 결심이 결코 대전환은 아닙니다. 신민당 창당에 결정적 역할을 한 나로서는 신민당을 통한 민주주의 쟁취가 최상의 방법이라고 믿어왔읍니다. 그런데 신민당의 장점이 무엇입니까. 결국 국회에 의석을 갖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국회에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장외 투쟁을 해 오다가 원내 진입 타이밍을 지금으로 잡는 이유라도 있읍니까.
『사실 장외 투쟁을 하면서도 모든 일이 때가 있듯이, 언제쯤 들어가는 것이 좋을까를 늘 생각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다가 학생들의 잇단 분신 자살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읍니다. 문익환 목사의 구속도 예사일로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소수 학생과 경찰간의 폭력 격화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이러다간 국민 지지도 못 받고 민주주의에도 도움이 안되겠다는 판단을 한 거죠.』 -그러나 신민당은 그동안 운동권 학생들의 「행동력」에 은근히 의존해 오지 않았읍니까.
『그렇지 않아요. 나의 신념은「평화적·비폭력 투쟁」입니다. 어떤 형태든지 혁명적 방법에 의한 정권교체는 작은 폭력이 큰 폭력을 부르듯 우리 국민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사면 복권과 직선제가 전제돼야 헌특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던 김대중씨를 어떻게 설득했읍니까.
『김대중씨는 집념이 강하고 용기 있는 분이지요. 내가 그랬읍니다.「당신의 사면 본권과 구속자 문제를 떼어서 구속자 문제만 해결되면 헌특에 참여하자」고 했읍니다. 얘기가 복잡합니다만「사면복권이야 정치를 하고 못하고의 일이지만, 구속자 문제는 기본 인권의 문제가 아니냐」고 했지요. 이를 받아들인 그가 고마워요.』
-정부가 구속자 석방에 성의를 보이고 신민당이 헌특에 참여하면 여야간 합의 개헌의 가능성은 있읍니까.
『어떻게 하든 합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헌정사가 이렇게 기구하게 된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늘 힘있는 자가 개헌안을 강제 통과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번만은 정말 전두환 대통령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낙오자가 되지 않겠금 합의 개헌을 해야합니다. 그래야만 정치 보복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부 여당은 직선제만은 안 된다고 하고 있고 신민당은 한사코 직선제 관철을 주장하고 있으니 타협이 되겠읍니까.
『민정당은 아직 안이 없지않습니까. 신민당은 직선제가 선거 공약이었던 만큼 지금 단계에서는 누구도 바꿀 수 없읍니다. 그러나 2·12총선 당시 그 동토에서 우선 선거가 있게 한 것이 중요했듯이 헌특이 구성되게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하며 저쪽 안이 나오면 피차 백지상태서 협상해야죠.』
-당내 동교동계를 비롯, 많은 사람들이 김 고문은 내각책임제에도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던데요.
『80년 5·17 직후 연금됐을 때 처음 얼마간 나는 분해서 견딜 수 없었읍니다. 저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김대중씨와 나 둘 중 하나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읍니다. 물론 대통령 직선제 외엔 생각조차도 안했지요. 그러다가 83년 5월 단식을 계기로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읍니다.』 -그래서 내각책임제를 생각하셨읍니까.
-『아니예요. 단식 후 교수·지식인들을 두루 만나는 가운데 우리의 여건에서는 권력이 분산되는 내각책임제가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읍니다. 골똘히 생각해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싶어 지금까지 내각책임제는 일축했지만 이제 극단적으로 배제하지는 말아야 되겠구나 하는 말을 주변에 한 적이 있지요.』
-그 생각이 지금도 변함없읍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랬더니 그 후 여당이 마치 김대중씨와 내가 권력구조에 관해 엄청나게 이견이 있는 것처럼 선전하더군요. 신민당을 만드는 데는 내가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직선제를 당론으로 정하는데 영향력을 덜 미친 것은 사실이예요. 그러나 나는 직선제 당론에 이의가 없고 충실히 지킬 생각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오히려 헌특 과정에서 신민당이 어쩌면 신축성을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그 문제를 얘기할 때가 아닙니다. 아직 헌특이 구성도 안됐고…. 신민당의 당론은 직선제입니다.』 -구속자가 전원 석방되지 않으면 헌특은 구성되지 않는 것입니까.
『한꺼번에 다 풀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은 있겠지만 그렇게 목표를 정했으니 관철해야죠. 이민우 총재와 김동영 총무가 최선을 다해 헌특은 구성되게 해주리라 기대합니다.』 -l동교동계와는 구속자 석방이 과연 전제 조건이냐, 석방 규모는 얼마면 되느냐를 놓고 신경전이 벌어지고 이따금 갈등이 표출되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김대중씨와의 협조는 튼튼합니까.
『우리 두 사람이 자란 과정부터가 다른데, 생각과 말이 다 똑같을 수야 있겠소. 그러나 둘 다 독재 정권으로부터 핍박도 받고 고생도 할 만큼 했으니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는 모두 종국적으로 합의할 수 있을 겁니다.』
-합의 개현을 하고 보복 없는 정치를 실현하려면 정부 여당을 대하는 태도도 80년도와는 달라야 하지 않겠읍니까.
『물론이지요. 80년과 지금은 세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읍니다.
첫째, 그 때는 진짜 힘있는 사람들이 전면에 나와 있지 않아 우리(양 김)는 과도 정부의 최규하 대통령과 상대를 해야했읍니다. 둘째, 김대중씨와 나는 당시 대통령 자리를 놓고 서로 공격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사이였읍니다. 세째, 그때는 재야가 힘이 없었지만 지금은 강력한 재야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민주화를외해 현 정부와 어떻게 타협하실 생각입니까.
『우리는 대화의 상대가 힘이 없어 벼랑으로 밀리는 사태를 원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이유로 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정치에 폭력이 들어와서는 안됩니다.누 구도 패배하지 않고 모두 승리자가 되는 민주화가 되어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의 차이가 「88년에 그만두겠다」는 점에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슐츠」 미 국무장관이 다녀간 후 미국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미국이 그런 나라라는 것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미국으로서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정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테고 또 흔들어 안보에 위험을 주고 싶지도 않겠지요. 그러나 미국은 우리 국민들에게 독재 정권을 지원하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되며 국민편에 서야 합니다. 민주화는 우리 손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일부 대학생들의 과격·폭력 투쟁과 신민당의 「혁신」 수용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먼저 소수 학생들이 얼마나 좌절감에 빠졌으면 폭력을 썼겠느냐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신민당은 보수정당입니다. 그러나 유럽의 예에서 보듯 보수정당이 혁신적 요구를 많이 수용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이며 우리라고 예외 일 수 없읍니다. 장기적으로는 실세를 대변할 수 있는 혁신 정당이 나와야 하며 당장은 신민당이 분배 문제에 더 신경을 쓰고 공천 등에서 젊은 세대를 과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민당의 수권 능력을 의심하는 여론도 있던데요.
『가소로운 얘기입니다. 정치에 제일 중요한 것은 경험입니다. 경험이야말로 시행착오를 막는 가장 훌륭한 학문입니다. 현 정권의 무수한 시행착오를 생각하고 그들과 우리의 경험 축적을 비교해 보세요. 지도자만 튼튼하면 저절로 인재들이 모이는 법입니다]

<사진 양영훈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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