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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 천국을 만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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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영과 현대 뮤직라이브러리

디자인 라이브러리 만들며 생긴 노하우 활용
공연장은 작지만 뮤지션 자존심 지켜주는 공간
샤넬 등 패션 브랜드 관계자들 벤치마킹도

건물 지을 때 의도적으로 빈 공간 살려
뚫린 틈으로 강남 전망 시원하게 펼쳐져
LP재킷의 아날로그 감성, 공간에 묻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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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왼쪽)이 지난 6월 뮤직 라이브러리 바로 옆에 들어선 음반매장 ‘바이닐&플라스틱’ 공사중 외관 작업을 맡은 아티스트 아카시 니할라니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정 부회장은 니할라니의 작품이 너무 마음에 들어 직접 공을 들인 끝에 그와 작업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니할라니가 영구 설치작업을 한 건 ‘바이닐&플라스틱’이 처음이다. [사진 정태영 페이스북]

엘튼 존, 혁오밴드, 그리고 언프리티랩스타.
풀어서 설명하자면 각각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세계적 슈퍼스타, 예능 ‘무한도전’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얻은 인디밴드, 그리고 케이블TV의 여성 래퍼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이 셋을 나란히 세울 수 있는 공통점은 딱 하나, 서울 이태원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의 언더스테이지 무대다. 혁오밴드의 게릴라콘서트나 언프리티 참가자들의 미션 공연이야 뭐 제법 어울릴 법도 하지만 스탠딩으로 꽉꽉 채워도 500명을 겨우 수용할 수 있는 지하 2층의 이 작은 공연장에서 엘튼 존이 공연을 하다니-. (※엘튼 존은 2015년 11월 언더스테이지 무대에 서기 전인 2012년 내한공연 당시엔 1만 5000석 규모의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무대에 섰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의 말대로 “음악적 자존심을 지켜주는 공간”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체 얼마나 특별한 공간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난해 6월 개관하자마자 이태원의 랜드마크가 된 지상의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와 지하의 언더스테이지, 그리고 지난 6월 뮤직 라이브러리 바로 옆에 새로 생긴 음반 매장 바이닐&플라스틱이 지닌 공간적 의미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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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의 구조물을 한 단어로 정의하라면 가장 적합한 단어가 바로이 ‘틈’이다. 채우지 않고 비움으로써 사람과 공간을, 강북과 강남을 하나로 연결시켜준다. 내벽을 래핑한 거대한 설치작업은 프랑스의 스트리트 아티스트 JR의 작품이다. 히피문화의 정점이던 1969년 롤링스톤스 공연을 담은 빌 오웬스의 사진을 활용해서 만들었다.

뮤직 라이브러리는 현대카드의 라이브러리(도서관) 시리즈의 세번째 작업이다. 2013년 2월 가회동에 디자인 라이브러리를 처음 연 데 이어 그 이듬해 청담동에 트래블 라이브러리를 만들었고, 지난해 6월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뮤직 라이브러리를 개관했다. 앞서 두 개의 라이브러리가 도서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장서 위주의 컬렉션을 선보였다면 뮤직 라이브러리는 책(3000여 권) 뿐 아니라 바이닐(LP음반, 1만여 장)로 컬렉션을 확장했다. 서가에 꽂혀있는 LP판을 꺼내 입장객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턴테이블에 얹으면, 지직거리는 아날로그적 감성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원래 도서관이란 공간 자체가 더할 나위없이 아날로그적이지만 특히 뮤직 라이브러리는 이처럼 아날로그적 경험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디지털 시대, 그것도 가장 디지털적인 금융회사가 이토록 아날로그적 감성에 집착하는 이유 등등이 궁금해서 정태영 부회장에게 직접 물었다. 본업이 아닌 얘기를 하는 게 부담스럽다면서도, 전화로 물을 때마다 늘 기대 이상으로 디테일하게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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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 라이브러리는 희귀반을 250여 장 소장하고 있다. 그중 아주 귀한 6개의 LP재킷은 상설로, 그외엔 매달 20개씩 번갈아가며 전시한다. 8월엔 앤디 워홀이 디자인한 게 2개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벗겨지는 바나나 껍질, 지퍼를 열면 내려가는 청바지(윗줄 왼 쪽에서 5,6번째)가 그의 작품이다.

-지겹도록 들은 얘기겠지만 왜 카드회사가 라이브러리를 자꾸 내놓는 건가.

“원래 시리즈로 할 계획은 없었다. 처음엔 디자인 라이브러리만 할 생각이었다. 사실 그걸 놓고도 말이 많았다. 카드회사가 왜 신용카드와 직접 관련이 없는 공간을 운영하느냐며 안팎에서 다들 낯설어했다. 그렇게 고민만 하면서 2~3년을 보내던 차에 마음에 드는 장소가 나왔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왜 하느냐를 따지지 말고 그냥 하자’고 했다. 결정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옳은 결정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에너지를 집중하는 게 현대카드의 방식이다. 그리고 사실 그 정도의 디자인 작업물 하나쯤은 우리가 해도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디자인 라이브러리라면 우리 철학과 기업문화를 집약해서 보여줄 수 있는 공간 아닌가. 사람들에게 우리 브랜드를 각인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아주 상관이 없는 공간은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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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 라이브러리에서의 짧은 아날로그 경험이 아쉽다면 지난 6월 바로 옆에 문을 연 음반매장 바이닐&플라스틱에 가면 된다. 이공간 역시 단순한 매장이라기보다는 뮤직 라이브러리의 확장판에 가깝다. LP를 직접 들을 수 있고 턴테이블을 살 수도 있다. 외벽은 뉴욕의 스트리트 아티스트 아카시 니할라니의 작품으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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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넌의 반전영화 촬영 소식을 담은 ‘롤링 스톤스’ 창간호. 롤링 스톤스 창간호부터 단 한 호도 빠지지 않고 전부 실물로 볼 수 있다.

-디자인이야 워낙 현대카드가 강점을 지니고 있다지만 트래블과 뮤직은 또 뭔가.

“디자인 라이브러리를 만들고 나니 아쉬움이 컸다. 뭔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반응이 좋아서. 만약 디자인 라이브러리를 대충 만들었다면 역설적으로 트래블이나 뮤직 라이브러리 같은 후속은 없었을 것이다. 하드웨어(건축과 인테리어) 적당히 하고 책 1만 권쯤 적당히 사다 꽂았으면 그걸로 끝났을 거란 얘기다. 하지만 제대로 장서 수집을 할 수 있는 북 큐레이터를 고르고, 그 큐레이터가 컬렉션의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따라 출판사 목록을 추려서 30여 개국에서 책을 사왔다. (※디자인 라이브러리를 만들기 위해 4명의 팀원들이 1년 동안 방문한 국가는 36개국, 연락한 출판사 1678군데, 출판목록을 분석한 디자인 출판사 2000여 개, 검토한 장서 수가 무려 4만 3246권, 그 중 1만 1498권을 골랐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수집 노하우가 쌓였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소싱 경험이 우리의 자산으로 남은 거다. 그만 두기가 너무 아까웠다. 아, 그렇다면 하나만 더 해볼까. 그래서 나온 게 트래블 라이브러리다. 디자인은 갇힌 단어라면 트래블은 열린 단어다. 디자인은 우리가 필요해서 만든 거라면 트래블은 시장의 니즈를 반영한 것이라는 얘기다. 디자인과 트래블, 영역은 다르지만 라이브러리를 만드는 과정은 똑같다. 쌓인 노하우 덕분에 훨씬 편하게 하기도 했고.”

-하나만 더였는데, 거기서 또 하나를 더 했다.

“솔직히 클래식 콘서트홀 프로젝트를 몇 년 동안 구상해왔다. 그러는 사이 클래식이 시들해졌다. 그렇다면 클래식 공연장이 아니라 차라리 라이브러리 시리즈로 가면 어떨까 싶었다. 뭔가 대단한 사연이 있으면 좋겠지만 이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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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 뮤직 라이브러리를 정의하는 또 하나의 단어는 ‘경사’다. 원래의 경사면을 구조물 안에까지 그대로 살렸다.

-뮤직 라이브러리의 언더스테이지는 어떤 공연장으로 다가가길 원했나.

“기존의 공연장은 크고 좋거나 아니면 작고 허름하거나 이렇게 두 부류뿐이었다. 작고 좋은 건 감히 언더스테이지가 처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지만 음악적 자존심을 지켜주는 공간, 그러면서 음악적 실험이 가능한 공간이다. 뮤직 라이브러리는 외국에서도 보기 어렵다. 그런 상징성 때문인지 샤넬 등 유수 패션 브랜드의 관계자들은 죄다 다녀갔다. (※샤넬측은 본사 임원이 방한했을 때 한국 고객이 이용하는 가장 핫하고 트렌디한 곳을 둘러보겠다는 취지로 이태원 뮤직 라이브러리와 청담동의 편집매장 10꼬르소꼬모를 방문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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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중인 희귀반 중에 가장 귀한 앨범이 비틀즈가 1966년 발매한 ‘붓처 커버’다.

-본격적으로 공간 얘기를 해보자. 만드는 방식은 비슷했다지만 공간은 세 곳이 확연하게 다르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현대카드엔 1부터 7까지의 자체적인 도량시스템이 있다. 1은 가장 현대카드스러운 것이다. 예컨대 4라면 현대카드스러운 것에서 약간 벗어난 정도라고나 할까. 라이브러리 시리즈를 만들 때 공간 면에서의 딱 한 가지 기준은 ‘전부 7로 가자’는 거였다. 다시 말해 연관성을 없애기로 한 거다. 다 비슷비슷해서 뻔하게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게 아니라 상상 이상의 다른 걸 보여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가회동, 청담동, 이태원을 오가며 라이브러리를 볼 때마다 왜 이리 다르지 하는 느낌을 줄 수 있게 차별성을 극대화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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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 라이브러리 지하 2층의 언더스테이지 무대. 천장을 뚫어 아티스트 연습실이 있는 지하 1층과 연결시켰다. 두 층을 잇는 벽면에는 포르투갈 작가 빌스의 벽화가 있다.

-뮤직 라이브러리는 건축 구조물 자체보다 빈 공간이 더 인상적이다. 이 비싼 땅에 건물을 짓는 대신 뻥 뚫어 놓다니. 무슨 의도였나.

“안 채워도, 아니 안 채워서 더 의미가 있다. 라이브러리 위치가 언덕 오르막 중턱에 있다. 평소 이곳에 아무리 예쁜 건물을 짓는다해도 비어있는 것만큼 예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주변 건물들이 다 별로 높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풍경을 막고 있어 답답했다. 그걸 뚫어서 이쪽 공간과 저쪽 공간을 이었다는 게 뮤직 라이브러리의 가장 큰 특징이다. 빈 공간을 살리기 위해 최소한의 용적률을 적용했다. (※최문규 연세대 건축과 교수는 정 부회장의 의도를 살려 ‘도시의 틈’이라는 컨셉으로 라이브러리 건물을 설계했다. 이곳에 서면 뚫린 공간으로 저 멀리 강남까지 전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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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잘린 인형 등이 논란을 일으키자 새로운 커버로 다시 내놓았다.

-멀리서 보면 ‘틈’이, 그리고 이 앞에 서면 ‘경사’가 인상적이다.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살린 것도 그렇지만 그 경사면을 구조물 안까지 끌고 들어간 게 이색적이다.

“사연이 있다.”

※사실 정 부회장은 가장 많은 시간을 이 경사에 얽힌 사연을 설명하는 데 썼다. 하지만 공개해서는 안 되는 이유 역시 그만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너무나 재밌는 뒷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아쉽게 그 얘기를 지면에 쓸 수가 없었다.

-디자인 라이브러리에 이어 이번 뮤직 라이브러리에 이르기까지 아날로그적 감성이 두드러진다.

“디지털 시대라는 건 지식검색 시대라는 말과 동의어다. 인터넷 검색에 대한 수요는 더 많아지겠지만 이것만으론 안되는 게 분명 있다. 책장에 꽂힌 책을 우연히 꺼내다, 또 책장을 넘기다 우연히 찾는 발견은 검색으로는 결코 안되는 것 아니냐. 우리는 디지털을 강조하는 금융회사다. 하지만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의) 균형추는 필요하다. 우리가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 디지털 시대라지만 책과 도서관이 필요없는 시대는 아니다. 사람에게는 아날로그적 경험이 중요하다. 그게 재미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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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 라이브러리 내부. 턴테이블 앞에 앉아 서가에서 직접 꺼낸 바이닐(LP) 음반을 들을 수 있다

-구조물 뿐 아니라 내부 인테리어, 그리고 곳곳에 배치된 작품을 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페이스북 본사 작업을 한 미국 회사 겐슬러가 인테리어를 맡았다. 외관 벽을 장식한 현대미술계의 슈퍼스타 JR의 거대한 작품이나 언더스테이지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포르투갈 작가 빌스의 벽화 모두 겐슬러가 추천한 것들이다. 하지만 최근 문을 연 바이닐&플라스틱 외관을 장식한 미국의 스트리트 아티스트 아카시 니할라니는 내가 직접 섭외했다. 기발한 작품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너무나 마음에 들어 수소문 끝에 서울로 모셔왔다. 고깃집에서 소주 사가면서 꼬셨다.”

-라이브러리 시리즈는 얼마나 더 할 생각인가.

“현재로선 뮤직 라이브러리가 마지막이다. 하지만 또 모르지. 라이브러리에 너무 재미 들리면 안된다고 계속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다.”

뮤직 라이브러리
운영시간:
화~토요일 낮 12시~밤 9시, 일요일 낮 12시~오후 6시(매주 월, 추석·설날 휴관)
입장자격: 현대카드 회원 본인 및 동반 2인 무료 입장(동시 입장 20명 제한)
1층 카페와 지하 2층 언더스테이지(공연장), 음반매장 비닐&플라스틱은 현대카드 외 다른 신용카드로 구매 가능


글=안혜리 기자 ahn.hai-ri@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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