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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졸리앙의 서울일기

⑮ “모든 일엔 양면이 존재” 철학자 말처럼 고정관념을 버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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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나는 어제 동네 목욕탕에서, 내가 이 세상에 얼마나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인지 새삼 깨달았다. “앗 뜨거워! 물이 아주 펄펄 끓어요!” “어휴, 여긴 또 왜 이렇게 차가운 거야!” “맙소사, 오늘 사우나에 사람 되게 많네!” “저 사람 완전 또라이군!”

현실이 나를 치유하는 순간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판단의 감옥에서 벗어나 현실에 발을 디디는 힘, 멘털의 간섭을 벗어 던지고 일상에 뿌리내리는 삶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중에서도 노예 신분으로 철학자가 된 에픽테토스는 삶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사람에게 아주 훌륭한 스승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모든 일엔 양면이 존재한다. 가령 당신의 형제가 부정할 경우 굳이 부정한 눈으로 볼 필요가 없다. 어차피 그는 부정하니까. 반면 우애의 눈길로 바라볼 때 그는 여전히 당신의 형제다.”

이런 스토아 철학에서 니체는 체념의 유행을 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숙명론을 조장하고, 사람들의 치켜 올린 팔을 내리라고 종용할 때 철학은 종종 부정의 공범, 독재의 도구로 전락했던 역사가 있다. 스토아 철학의 참다운 이해는 그런 어두운 철학의 이력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불운과 부정 속에서도 힘을 잃지 말라 격려함으로써 용감한 삶의 투쟁에 임하도록 인간을 돕는다.

에픽테토스가 가르치고자 한 것은 삶에서 우리 뜻에 달린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를 뚜렷이 구분하는 지혜다. 붐비는 공중목욕탕, 교통체증, 변덕스러운 날씨, 시끄러운 소음. 이 모든 것은 당장 내 능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대신 삶을 향해 미소 짓고, 예기치 못한 일을 받아들이며, 앞으로 닥칠 사태를 대비하는 일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장기판 앞에 앉은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에게 장기의 정해진 룰은 답답하기만 하다. 말을 움직이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며 하루 종일 툴툴거린다. 이건 왜 직선으로 가지 못할까, 저건 어째서 두 칸밖에 움직이지 못하나, 짜증이 폭발 직전이다. 물론 다른 그림도 가능하다. 정해진 장기판의 규칙과 더불어 놀고, 그 구속 안에서 기발한 자유를 창출하는 누군가의 모습. 당신 역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삶을 욕할 수도, 삶과 더불어 즐길 수도 있다.

에픽테토스는 우리에게 닥치는 일을 대면하는 우리의 자세 속에 우리가 겪는 고통의 뿌리가 있음을 가르친다. 어디까지나 사실에 머물러야 한다는 점이 가르침의 골자다. 저 남자가 내게 시비 거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그를 천하의 몹쓸 인간으로 단정하는 것은 나의 작위적 판단이자 의식의 불순한 첨가물일 뿐이다. 현실에 집중하되 불필요한 토를 달지 말 것. 과장하지 않으며, 쓸데없는 이름표를 갖다 붙이지 말 것.

배부르게 잘 살고픈 마음 또한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문제는 그 욕망이 머릿속 생각과 현실 자체의 간극을 자꾸 더 벌려놓아 고통만 가중시키는 상황이다.

뜨거운 목욕탕 물속에 다시 몸을 담그며 나는 생각을 고쳐먹는다. 철학자가 된 노예의 말 한마디를 정신 차리고 경청해도 내 인생은 달라질 수 있다고.

지금 이곳이 내게 건네는 현실을 가슴 활짝 펴고 받아들이자. 입맛 까다롭게 구는 것과 진정으로 현명한 삶의 자세를 혼동하지 말자. 우리의 에너지, 우리의 저항정신을 덧없는 몸부림으로 낭비하지 말자. 그것들은 보다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끈질긴 투쟁을 위한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자유를 향해 가는 노예라고 자신을 규정했다. 그러고는 2000년의 세월, 삶을 망칠 뿐 진정한 기쁨과는 거리가 먼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매일 우리에게 권유하고 있다.

졸리앙 스위스 철학자/번역 성귀수